"처음 리그에 참가했을 때는 솔직히 말해 도전자까지 될 줄 몰랐다.
하지만 모처럼 잡은 찬스인 만큼 쉽게 물러설 수 없다. 후회없는
도전기가 되도록 온 힘을 쏟아붓겠다."(조선진)
"한 동안 컨디션 조정에 애를 먹었는데 준비는 끝났다. 조선진 씨는
요즘 대단한 호조이며 바둑 내용도 좋다. 최강의 도전자를 만나
긴장되지만 어렵게 오른 정상을 꼭 지키겠다."(왕리청)
한국과 대만 기사가 일본 최고 타이틀 무대서 정면으로 맞선다.
왕리청(43ㆍ왕립성)과 조선진(31). 둘은 12, 13 양일 간 대만서
스타트하는 이번 제25기 기성전 도전 7번기에서 2개월여 동안 기사
인생을 건 일대 사투를 펼칠 참이다. 일본 바둑계 최정상 자리를 놓고
한국과 대만 기사가 겨루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싸움은 단순한
일본 국내 타이틀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기성전의 우승 상금은 3300만엔(약 3억6000만원). 타이틀 서열이 엄격한
일본에서 기성은 곧 1인자를 의미하며 왕리청은 꼭 1년전 조치훈을 4대
2로 꺾고 이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랭킹 6위 기전인 왕좌전서도 3연패를
이루며 현재 2관왕으로 군림중이다. 그뿐이 아니다. 지난해엔 국제
대회인 제2회 춘란배 결승서도 같은 핏줄의 마샤오춘(마효춘)을 제치며
세계 타이틀까지 획득, 기사 생활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조치훈 왕국'을 가장 먼저 허문 기사는 바로 조선진이었다.
누구도 접근 조차 겁내던 조치훈에게 다가간 조선진이 호랑이 수염을
뽑듯 랭킹 3위 혼인보 타이틀을 탈취한 것이 99년 여름. 이 사건은 이듬
해 왕리청과 요다의 기성 및 명인 함락으로 지각 변동의
신호탄이 됐으나 정작 조선진은 그 와중에서 '1년 천하'를 마감해야
했다. 지난 해 7월 첫 혼인보 방어전서 또 다른 대만 출신
왕밍완(왕명완)에 무릎을 꿇은 것. 결국 이번 조선진의 기성 도전에는
개인적 재 도약 여부외에도 조씨 성과 왕씨 성, 한국과 대만세
간의 얼키고 설킨 은원 관계가 배경으로 깔려있는 셈.
그렇다면 이번 대결의 승자는 누가 될까. 경험 면에선 일단 왕리청이
앞선 것으로 보인다. 그는 8시간짜리 이틀 바둑에 과거 세차례 등장,
세번 다 조치훈과 겨뤄 한번을 승리했다. 판 수론 8승 10패 1무. 반면
조선진은 두 차례의 혼인보전서 탈취와 상실 한 번씩을 맛봤으며 판별
전적은 6승 6패를 마크하고 있다. 8시간 바둑 뿐 아니라 국제 무대
경험서도 왕리청(우승 2회, 준우승 2회)이 조선진(준우승 1회)보다
우세하다.
하지만 조선진의 최근 기세는 심상치 않다. 혼인보 상실 직후 속기
기전인 제7회 아함 동산배서 우승, 곧바로 무관서 벗어나더니 지난 연말
같은 기전 중-일 우승자 대결서도 중국 1인자 저우허양(주학양)을 완파할
만큼 쾌조다. 비슷한 시기 천원전 도전자 결정전까지 올랐다가 고국 후배
류시훈에 패퇴, 그의 천원 탈취를 후원(?)하는데 그쳤지만 26기 명인전서
여유있게 리그 진입에 성공했다. 혼인보 리그서도 2승 1패로 선두권을
유지중이다.
첫 방어의 부담감에 시달릴 왕리청에 비해 심리적으로도 훨씬
홀가분한데다 지구전의 핵심인 체력 또한 12살의 어드밴티지가 있다.
역대 통산 전적은 4승 4패로 호각. 올 봄 일본 발 승리의
춘신은 한국과 대만 어느 쪽을 향할까.
( 이홍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