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 들어 처음 열리는 2002년 월드컵이 50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쯤이면 우리나라의 월드컵 대회 준비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현재 월드컵 경기장 건설은 80%의 평균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만 해도 짓느니 마느니 말도 많더니 어느 새 뚝딱뚝딱
해치웠는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어쨌든 경기장이 없어 경기를 치르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는 면한 것 같아 다행이다. 이제 문제는 숙박, 교통,
문화행사 등 소프트웨어와 한국 대표팀의 성적을 비롯한 월드컵 축구
경기의 내용일 것이다.

한때 '2002 공해'가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광란에 가까운 열기에
휩싸였던 월드컵 열풍은 침체에 빠진 경제 때문인지, 한국 축구의 수준에
대한 자각 때문인지 지금은 한겨울 날씨처럼 썰렁하기만 하다. 'IMF
시대'를 극복했다는 선언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그보다 더한
경제위기가 온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요즈음의 우리 형편에 월드컵만
열리면 모든 근심거리가 사라질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월드컵을 두
번이나 치른 멕시코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알고 있으니 장밋빛 환상을
품을래야 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월드컵은 우리에겐 너무나 좋은 기회다.
월드컵 개최로 파생되는 경제적 효과가 천문학적 액수에 달한다는 식의
연구 결과에는 이미 신물이 났지만, 일단 10개 도시에서 건설 중인
축구장만 생각해도 나 같은 축구팬들에겐 월드컵은 '남는 장사'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기본적인 인프라 구조가 갖춰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2002년 월드컵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수준을 여러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 문화뿐만
아니라 행정능력, 교통 및 환경 문제, 치안 확보와 질서 유지, 관광 자원
개발 등 우리 사회 여러 분야의 역량을 점검하고 장기적인 발전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2002년 월드컵은 '목표'가
아니라 '도약의 발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소에는 '엉망'이다가 검열
때만 되면 소위 '신바람'이라는 걸 일으켜서 그런대로 사태를 땜질하는
데엔 도가 터 있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을 들먹일 것도 없다. 한국
축구만 해도 「터무니없는 기대, 광란에 가까운 흥분, 아득한 절망,
대표팀 질타, 각종 위기설, 억지로 희망 갖기, 터무니없는 기대…」를
거듭하는 롤러코스터 순환공식에 갇혀 있지 않은가.

우리 축구, 우리 사회가 2002년 월드컵까지 충분한 도움닫기를 해서
한껏 도약할 것인지, 아니면 도움닫기 단계에서부터 비실거리다가
발판까지 가지도 못하고 넘어져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실천의지에 달려 있다. 대한축구협회와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모든 지혜를 끌어모아 멋있고 매끄러운 대회 운영을 위해
만전을 기해야 하며, 월드컵 이후에도 한국 축구의 장기 발전 계획을
착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선수와 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축구인들은
정정당당하고 흥미진진한 경기가 고급 축구 문화의 정수임을 명심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나 같은 축구팬들은 대표팀 경기 결과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프로 축구를 비롯한 여러 등급의 축구 경기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서
선수들이 멋진 경기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줘야 한다. '기본'과
'본질'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장기적인 투자,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이 없다면 그 어떤 '거룩한 말씀'도 그저 '먹물 흉내'일 뿐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자연대 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