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보스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형선호 옮김, 동방미디어.

미국의 커피는 세계에서 맛 없기로 이름난, 말 그대로 '아메리칸
커피'였다. 지금도 그렇다고 상상하면 큰 코 다친다. 베를린의 낡은
호텔이나 파리의 노천까페에서 맛볼 수 있는 커피가 '스타박스'라고
불리는 체인점을 통하여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커피자본은
길모퉁이 카페의 정취를 모조리 흡수하여 새로이 부상하는 계급의 구미를
돋군다. 아침 일찍, 또는 늦은 오후에 노트북이나 전문저널을 들고
카페문을 들어서는 그의 외양은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평범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비범한 구석이 있다.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자신감있는
눈초리, 기득권과 전통에 대한 경멸, 창의적인 것에 대한 무조건적
존경심, 저항적 기질, 반물질주의, 때로는 영적 세계에 대한 동경 등등의
단순치 않은 인상. 미국을 경제대국으로 올려놓은 포드시스템을 지극히
혐오하면서 성장해온 그는 미국산 포도주에 체게바라 상표를 붙이고,
칼빈 크라인에 동성애자의 터치를 그려넣어 '문화적 반역을 상업화'하는
데에 성공한 교양 갖춘 신종, 일본식으로 말하면 신인류인 것이다.

시대변화에 대한 저널리스트 특유의 감각을 가진 저자가 4년 반만의
외출에서 돌아와 목격한 풍경은 이런 교양층들이 비지니스는 물론,
소비생활, 문화와 예술, 지성계와 저널리즘, 건축과 공간활용, 성과
감각의 세계까지를 자신들의 '절제된 반역'으로 영토화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밀실의 광장화를 꿈꾸는
인간들이라고 할까. 이미 부르주아가 점령한 광장에 보란 듯이 나서서
반문화, 반물질, 진보와 반항의 언어를 버리기는 커녕, 밀실적 코드와
유목민적 기질의 시장화가 가능함을 가르치는 무서운 혁신자이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는 항상 보헤미안의 경멸대상이었다. 부르주아는
사업과 시장에서 번창했다면, 보헤미안은 예술과 감성의 세계에서
자라났다. 그들은 항상 갈등과 반목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디지털시대가
촉발한 자본주의의 대변혁으로 양자의 상호융합 또는 공존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부르주아는 보헤미안의 '거역의 정신'에서
이윤의 계기를 발견하고, 보헤미안은 창조적 이탈과 모험으로 부르주아의
막힌 출구를 뚫는다. 보헤미안은 반항적 정신의 상업화로 어느 날 갑자기
성공한 사업가, 유명한 디자이너, 디지털계의 샛별, 저널리즘의 총아로
변신한다. 이른바 '부르주아 보헤미안(Bourgeois
bohemian)'('보보'는 rm 첫글자를 딴 것이다)으로 불리는 '새롭게
부상하는 계층'이 탄생한 것이다.

보보계층에 대한 저자의 사회학적 해석은 미국인의 습속에서 민주주의의
토양을 발견하는 토크빌(Tocqueville)의 예지와 닮은 꼴이며,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에서 중산층의 저력을 찾아내는 로버트
벨라의 세련된 시선에 버금간다. 군수산업의 쇠퇴를 미국헤게모니의
하락으로 연결짓는 폴 케네디의 유명한 오류와는 달리, 60년대의 저항적
히피문화가 80년대의 시장과 결합하여 새로운 미국의 문화적 동력으로
분출되었다고 파악하는 저자의 주장은, 보보계층이 추구해온 영구혁명의
에토스가 시장과 생활세계에서 상징권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미국의
현실에서 확인된다. 보보계층은 디지털시대가 요구하는 혁신의 제조자,
기존질서를 부수는 전위부대, 상징권력을 장악한 새로운 엘리트들이다.
그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그것을 거부하는 끝없는 파르티잔이며, 돈을
벌자마자 돈을 버리는 신교도적 탐험가들이다. AOL, 아마존 닷컴의
창시자들이 얘기하듯, 그들은 갑부가 되었지만 돈은 그들의 정신세계와
생활스타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보보는 우드스탁에 대한
열광적 기억을 정보화 코드로 재현해서 반물질주의의 문화상품을
제조하는 디지털시대의 부르주아이자 삶의 자기표현을 넓혀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학식있는 비트족인 것이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였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세계화'의
혐의를 품고 있는 모든 장소와 풍경들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그런
것이었다면, 이 책은 보보의 존재양식과 터치가 발견되는 미국 내의 모든
은밀한 곳까지를 들춰준다. 그의 무진장한 소재동원력과 유려한 문체에
포획되어 꼼짝없이 끌려 다녀야 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큰 재미다.
그런데, 보보계층의 정신적, 문화적 자원에 대한 자유분방한 해석의
원천인 그의 풍부한 상상력 앞에서 지난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학자들의
사회적 진단과 개념의 유효성이 여지없이 무장해제 당하는 것을 방관하는
일은 나 같은 사회학자에게는 더 없는 흥분거리이다.

다니엘 벨(Bell)이 그 중 하나다. 공동체적 윤리의 복원을 위해
보수주의 저널인 '퍼블릭 인터레스트'를 창간하기도 하였던 벨은
1970년대 미국의 자본주의가 자기규제적이고 금욕적인 신교도 윤리를
상실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자본주의는 향락적 소비문화와 자기탐닉적
쾌락이라는 문화적 모순에 의하여 스스로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저자는 벨이 지목했던 항목들―히피적 자기탐닉, 베이비부머들의
모험과 거부의 에토스, 열정과 매혹 속에서 건져올린 자기 해방―이
오히려 미국사회를 창의적, 효율적으로 만들고 있는 문화자본임을
역설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이 서로를
흡수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광경이다"는 저자의 말대로,
질서와 해방의 조화가 세계화 시대의 추동력이라면,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일대 변신을 예약하는 반란은 어디에서 잉태되고 있을까?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