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김종근ㆍ미술평론가ㆍ홍익대 겸임 교수
미니멀 아트나 개념미술 같은 70년대 미술은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우아했다. 점차 머리로 읽어야 하는 그림에 싫증을 느끼던 대중들은
가슴으로 느끼고, 눈을 즐겁게 하는 그림에 목말라 했다. 이 현상은
뉴욕과 파리, 이탈리아,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침 미테랑과 쟈크 랑의 문화정치가 등장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1981년
파리의 몇몇 젊은 미술가들은 저속하고 더러는 퇴폐적이며 장난기 서린
그림들을 피킷처럼 들고 거리를 도배하기 시작 했다. 그들은 시골출신인
로베르 콩바스, 프랑수아 브와롱 그리고 에르베 디 로자 등이었다.
이들은 1981년 6월 평론가 라마르슈 바델의 후원에 힘입어 개막한
'성공리에 끝내기'란 전시를 통해 이른바 '자유구상'이란 그들의
존재를 기성화단에 알렸다. 결국 보수적이던 화랑가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하던 자유구상 작가들을 대접하게 됐고, 이 자유구상 물결의 선두에
선 이가 바로 에르베 디 로자이다.
파리 바스티유 근처의 아틀리에에서 디 로자를 만났다. 그는 유난히 큰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때론 장난스럽게, 때론 위악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의 예술관을 털어놓았다.
―당신을 비롯한 자유구상주의 작가들은 욕망을 여과없이 내뱉거나 틀
없는 캔버스, 지저분한 천, 포장지, 벽보, 장난감을 저질 만화처럼
천박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당신에게 있어 예술은 욕망의 배설입니까.
"콩바스와 나는 10대 때 같은 책상에서 만난 친구입니다. 우리는 20대에
이미 미술학교에서의 길들이는 습관적인 교육을 회피했습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제도에 대들고 반항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
것부터 배웠고, 기존의 아름다운 표현은 물론, 미술의 역사를 배우는
것까지 모두 거부 했습니다."
―80년대 당신들이 추구했던 저속하고 파격적인 미술들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미술들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당신들의 노력 덕택이었습니까.
"나는 미술의 위대함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성공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이 우리들의 그림들을 보고 싶어했고
사주었으며, 비평가들은 우리의 난잡하고 자유로운 그림에 수없는 찬사와
축하인사를 해왔습니다. 그때 우리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물론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나 파리의 이봉 랑베르 같은 화상(화상)들과 프랑스 정부
그리고 많은 현대미술관들이 우리들을 전략적으로 후원했다고 봅니다."
―처음에 어떻게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나의 아버지는 프랑스 남쪽 바닷가 부두의 노동자였는데 별 쓸데 없는
가방들을 부두에서 주워 가지고 오셨습니다. 나는 그게 너무 창피했고,
보복하는 심정으로 그 못쓰는 가방에 근사하게 그림을 그려 비싼 값에
팔아봤습니다. 벌써부터 나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시작은 10살 때
생일 기념으로 그림을 그려 전시를 했는데 전시작이 매진되면서 나는
고향에서 일약 유명한 인기작가가 되었다."
―당신의 그림에는 대중매체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잡지나 신문, TV
등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또 그것이 자유구상주의의 특징입니까.
"내 어린시절은 텔레비젼에서 뿜어내는 나오는 무수한 영상 이미지,
만화, 축구중계, 잡다하고 통속적인 프로들로 넘쳤습니다. 그때 그런
것을 그린 그림들이 팔리면서 유명해졌고 그 때 그 그림들이 한참 후에
유행을 타게 된 80년대 풍의 그림들이었다. '자유구상'은 한마디로
미술 기법도, 정통성도, 문화에 대한 깊이나 지식 그런 진지한 것이라곤
전혀 없는 것입니다."
―기존 질서와 진지함을 거부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그렇다면 당신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우리들 주변에 무수한 영웅화 된 이미지와 기괴하며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희화적으로 드러내고 싶습니다. 나는 모든 그림의 주제나
이미지를 야한 외설적인 잡지며, 대중 연예지, 비디오 잡지 등에서
구합니다. 그런 이미지들은 바로 나의 언어가 되어 즉각적으로 그림이 돼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런 나의 그림을 보고 흥미 있어 합니다.
아름다움이나 따뜻함 대신 직설적·도발적이며 음악적 리듬감,
혼란스러운 색채가 빚어내는 신선함이 내 그림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흔하게 보던 문화에서 그것을 뭉개버리는 표현의 뒤집기인
동시에 자유로운 사고 자체가 그대로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신화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번안하거나
패러디하고, 그림으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림 대신 글시를 집어
넣기도 합니다. 내게 회화란 오직 감각입니다. 그 안에는 어떤 합리성도
없습니다. 특히 나는 대중 예술운동의 교본인 만화라는 양식을 통해 모든
대상들을 괴물들처럼 퍼뜨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나는 록음악,
탱크, 로켓, 여자, 섹스, 동물원, 바캉스, 음악회, 포스터까지 어떤
것이라도 그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는 내 그림이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고 믿지만 가끔은 스스로도 의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마치 칼날 위에 선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당신은 정처없이 이동하며 작업하는 떠돌이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나는 예술적 감각이 느껴지거나 보이면 작품이 필요로 하는 세계
어디로든 달려 갑니다. 1994년엔 검정 잉크로 목판화를 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가나로 가서 흑인들의 삶과 표정을 강렬하게 담아 냈고
베트남으로 가서는 자개작업을 해서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예술을
위한 이런 방랑은 인도네시아 켈리포니아 브라질 멕시코 등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당신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사랑과 불행, 전쟁과 소란스럽고
왁자지껄한 외설적인 내용들입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80년대의 명백한 상징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평론가 카트린느 미예는
당신들을 가리켜 "재주는 있으나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초등학생이
스케치북에 끄적거렸던 데생 정도"로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당신과 당신친구들이 추구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스케치북에 끄적거린 데생'이라구요, 맞습니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외설스럽고 잡스러운 내용들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주제이고 상징이라도 우리가 화면 위에 쏟아 붓듯이
내뱉는 이미지에는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색다른 요소가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는 '자유구상' 속에는 사회현상으로
고찰될 어떤 가치가 있다고 진단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말들을 그림으로 그려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