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나미(39)를 만났다. 지난 88년에 등단한 그녀는 중편 '그림자
놀이', '굴레', 혹은 장편 '기우뚱거리며 작아지는 섬 하나'(91년),
'실크로드의 자유인'(92년 MBC 문학상 당선) 등을 냈으나, 사실상 거의
잊혀진 이름으로 묻혀 있었다. 그러다 거의 9년 만인 올 겨울, 단편
'적요'를 발표했고, 그리고 3편의 중편을 엮은 첫 작품집
'얼음가시'(자인)로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얼음가시'에 실린,
전체 원고 1100장 분량의 중편 3편이 그녀의 굳건한 문학적 역량과
마력같은 서사의 힘, '모멸적 에그조티즘', 주옥같은 우리말 발굴과
탄탄한 문장 등으로 독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전반 모스크바 루뭄바대학 루슬란 어학원을 다니고, 고리키
문학대학 소설창작 석사과정을 수료한 그녀가 이번에 내놓는 소설들은
한결같이 러시아 사회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령 중편
'자오선'은 모스크바 국립영화예술대학 유학생 한준서가 그곳에서 겪는
얘기다. 부족한 재능과 광기어린 열정, 궁핍한 생활여건 등이 주인공에게
"닫힌 상황"으로 압박한다. 배경은 러시아지만, 러시아 사회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고독과 일탈, 부조리한 현실과 의식의 흐름 등
사뭇 실존주의적 탐구다. 자신의 분열된 내면을 타르코프스키 영화
'향수'와 대비시키며 사투를 벌이듯 살아가던 주인공은 우연찮게
이웃집 유학생의 부부싸움에 휘말려 살인미수 혐의를 받고 고국으로
압송당할 처지에 놓인다.

독자들은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제껏 다른 작가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여러가지 덕목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모국어에 대한 그녀의
남다른 사랑과 새로운 어휘 발굴, 참신한 표현 시도 등이다. 그녀는
문장의 탄탄한 기초가 얼마나 작가에게 중요한 무기인지 뼈져리게 깨닫고
있는 듯하다. '체구가 거쿨지다', '우줅거리다', '잠록하다',
'웅신한 저녁', '츠름츠름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등 아름다운
우리말이 섬뜩할 정도로 잘게 썰어진 짧은 문장들과 눈시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그녀의 작품은 그 배경에 '시대'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의
의식의 흐름 속에는 그 의식을 외연으로 감싸는 정치적 격변과, 그리고
그것들에 휘둘리는 주민들과 외방인의 삶, 그 변화들이 함께 들어 있다.
그녀의 대학 스승인 최인훈은, "이나미는 주인공들마다의 사정에 의해
굴절된 상황을 통하여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평소 치사를 아끼는 최인훈으로서는 극찬에
가깝다

이나미의 소설은 "이국풍"이다. 그러나 "환상적" 혹은
"동경하고픈" 이국풍이 아니라, "모멸적 낯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에 만나는 인물들은 그만큼 비루한 속물 근성을 감추지
않고 섬뜩할만큼 현실화돼 있다. 이나미의 세필화는 싸늘한 현실을
보듬고, 서사와 탐미 그리고 현실주의와 환상을 넘나들고 있다. 그녀의
작품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 작가의 냉철한 감각과 표현력, 소설론,
만만치 않은 소설적 재미, 러시아의 대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적 호흡
등에 혼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