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명성황후'의 주역 이태원(34)은 씩씩하다. 자칭 '통뼈'요
'왈가닥'이다. 그녀는 여행 다닐 때 망치며 펜치, 드라이버 세트를
지니고 다닌다. 어딘가에 필요할 것 같고, 망가진 가방을 수리하느라
써먹은 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냥 쇠붙이가 좋아서다.

취미도 칼 수집이다. 장도, 사무라이 검, 남북전쟁 군도, 단검에 표창,
입으로 부는 독침 통까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중국 무협
비디오는 안본 게 없다. 20~30편짜리 시리즈를 한꺼번에 빌려와 몇밤씩
새우며 보아 치운다.

그녀는 지난 3월12일 '명성황후' 공연을 끝낸 이튿날 런던으로 날아가
브로드웨이산 뮤지컬 '왕과 나'에 티앙 왕비로 출연하고 있다. 일레인
페이지와 제이슨 리, 두 거물급 주역이 혹평 받는 속에서도 '빼어난
가창력과 음악적 깊이'로 찬사를 받으며. 그녀가 짬을 내 서울에 왔다.
오는 29일부터 20일 동안 재개하는 '명성황후'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새 런던에서 대역이 더 잘하면 어떡하느냐"고 농반 물었더니 대답이
거침 없다. "더 오래 비워도 걱정 없어요. 내 무대 에너지를 따라올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도 얄밉지가 않은 게 이태원이다. 때 없는
솔직함이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전보다 날씬하고 얼굴도 갸름해졌길래
다이어트 하느냐고 물으니 1년 전 술을 끊은 덕분이란다.

그녀는 어릴 적 남자 애들을 패고 다녔다. 여자 아이들이 심술궂은
남자들에게 핍박 받는 게 싫어서 나무에 새끼줄을 감아놓고 피가 나도록
주먹을 단련하고, 레슬링 '풍차돌리기'에 기왓장 격파도 배웠다.

그러던 중3때 가족을 따라 미국 오하이오로 이민 갔다. 공군
파일러트였던 고모부의 제복을 선망했던 그녀는 공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시민권이 없어 포기했다. 부모가 피아노 잘 치는 여동생을
줄리어드 음대에 보낼 욕심에 뉴저지로 이사했는데, 정작 줄리어드는
이태원이 갔다.

노래 잘한다는 주변 얘기에 혹시나 하고 고3때 성악 레슨을 시작했고,
오디션용 네곡만 서너달 연습한 끝에 스스로도 놀랍게 줄리어드에
합격했다. 피바디대 장학생으로 디플로마 과정을 수료한 96년, 그녀는
7차례 오디션 끝에 '왕과 나'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왕비 역을 꿰찼다.

그리고 두번째 작품이 '명성황후'. 97년 봄 서울서 어느 기자가 "뉴욕
공연을 앞두고 주역을 현지에서 캐스팅한다더라"고 알려왔다. 그녀는
연출자 윤호진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관심 있는데 써볼 의향
없느냐. 후회 안할 것"이라고 했다. "근데 명성황후가 누구예요"라는
질문이 따라 붙었다. 나중 얘기로 윤호진은 "그렇게 용감한 한국 여자
처음 봤다"고 했다.

국내 공연까지 172회를 치르면서 그녀는 디스크에 걸렸다. 속옷을 몇겹씩
껴입는 궁장과 가발에 장식까지 20㎏에 이르는 무대 의상을 매회 2시간
넘게 감당했기 때문이다. 작년 10월엔 심한 근육 경련으로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펑크는 내지 않았다. "몸이 힘들 때 집중이 더 잘되고 편안할
땐 오히려 노래가 안되니 독종인 모양"이라고 자평한다. 지는 게 너무
싫어 가위 바위 보도 안한다는 그녀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포기하는
게 이기는 것일 수도 있다고 깨닫는다" 했다.

그녀는 데뷔작인 '왕과 나' 공연을 런던 포함해 1000회 넘겼고,
'명성황후'도 내년 일본·런던·호주 공연까지 빠짐 없이 참가할
생각이다. 감회가 걸작이다. "5년 넘게 왕비 역으로만 먹고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