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보십시오. 알지 못 할 그대여.
이 빛나는 겨울 아침 겨울 바다 앞에서 그러나 슬픈 이야기부터 꺼내게 됨을 용서하십시오.
지난 수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어두운 방안 가득히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강릉의 한 병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권오철씨가......조금 전 운명하였습니다.

나는 불을 켜고 서재로 갔습니다.
책상에는 며칠 전 그로부터 온 편지가 놓여있었습니다.
편지에는 아직도 그의 체온이 식지 않고 묻어있었지만 그 새벽에 시인의 영혼은 지상을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또 겨울이 옵니다. 저는 겨울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이 겨울을 이겨내려 합니다. 그래서 내년 봄 아름다운 시를 지어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매해 겨울은 그의 생명이 넘어야 할 산 같은 것이었습니다.

강릉에 사는 시인 권오철은 가슴 아래로는 거의 사지를 쓰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몹시 부자유하고 일 년 내내 병중에 사는 이 시인의 시가 그렇게 맑고 깨끗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시에는 조금만치의 고통이나 원망의 흔적 같은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처음 강원도 철원의 어느 분교에서 만나 교류한 지 올해로 열 세 해째가 되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다가 몸집도 자그마해서 나는 그를 오철아 오철아 하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쓸 때에만은 ‘권 시인에게’라고 시작했고 그는 내가 ‘권시인에게’라고 불러 줄 때 황홀해 했습니다. 잘 지켜지지는 못했지만 매주 금요일을 권 시인에게 편지 쓰는 날로 정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 시가 기도이고 일기이고 독백이라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사지를 꿈쩍할 수 없는 작은 방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이고 독백이고 일기인 것입니다. 기도이고 독백이고 일기인 그의 시는 강릉 해변의 솔바람처럼이나 청량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영혼의 사람에게는 겨울 나기가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찬바람이 나면 몸이 더 많이 아프고 호흡이 어려워져 늘 다음해 봄을 온전히 맞을 수 있을지를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권 시인은 겨울이면 역시 몸이 부자유하지만 한없이 착한 어린 아내와 함께 오랜 칩거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조금씩만 먹고 움직이지 않으며 그렇게 보내는 것입니다. 강릉 해당화가 꽃을 움틔우기 위해 잔가지와 잎들이 일제히 떨켜를 달고 고통을 참는 것과 같습니다. 유난히 춥고 지리했던 작년 겨울도 권 시인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고통스러운 만큼 그에게 봄은 보통 사람이 맞는 것보다 훨씬 감격스러운 것이어서 마침내 얼음이 녹고 따스한 햇살이 문에 비칠 때면 몹시 들뜨고 설레어했습니다. 겨우내 죽은 듯 보이던 고목 여기저기서 새 잎이 움트듯 그의 육신에도 생기가 도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피가 도느라고 몸이 여기저기 가려워질 때면 그의 시 또한 새로운 생명력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봄이 되었다 해도 그의 육신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거의 방안에 그대로 있어야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방 작은 창을 통해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음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네모난 창으로 지나가는 공기가 훨씬 빨라지고 하늘의 색이 훨씬 투명해 진다는 것을 압니다. 누군가 그의 몸을 운반해 맑은 바람과 햇빛 속으로 옮겨 주는 것을 그는 “화려한 외출”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휴가 가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그는 문 밖으로의 화려한 외출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지난 삼월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새 봄이 되고 처음 외출이 있던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어땠지?"
나의 질문에 그가 더듬더듬 대답했습니다. 외마디 비명 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한 기묘한 대답이었습니다.
"햇빛……감사……바람……감사……꽃……감사."


강릉은 해당화의 고장입니다.
바닷가 모래땅 아무 곳에서나 군락을 지어서 자라는 이 꽃은 봄이 무르익을 때에야 그 망울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꽃이 피어나기 전, 잔가지에는 가시가 먼저 나고 두껍고 작은 잎들마다 가장자리에는 톱니들이 나 있습니다.

이 가시와 톱니들과 함께 잎 표면에는 주름이 많고 뒷면 또한 털로 무성해집니다. 담홍색, 또는 하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가시와 톱니와 주름이 고통스러운 몸살을 합니다. 수분을 아끼기 위해 떨켜를 달고 한 겨울 내내 숨 죽여 지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강릉에는 해당화 같은 여류시인 허초희 난설헌이 있었고 사임당이 있었습니다. 가시와 톱니의 세월을 이겨 꽃을 피웠던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시인 권오철이 있었습니다.

이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천지가 연두빛으로 물드는 봄이 오면 아름다운 시를 지어 보내겠다는 권시인의 약속은 이제 지켜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작고 병약한 아내를 홀로 두고 겨울이 없는 나라, 이별이 없는 나라, 눈물이 없는 나라로 떠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달 밝은 밤 그 경포에서 술잔을 들면 다섯 개의 달이 한꺼번에 뜬다는 강릉입니다. 하늘과 호수와 바다와 술잔과 그리고 마음에 말입니다.
이 유난히 아름다운 시의 고장에 살면서 장애 시인 권오철은 네 권의 시집을 남겼습니다. 그 시집들은 한결같이 참된 아름다움이란 고통 속에서 건져 올려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선교장 돌담을 거닐며 나도 권시인을 흉내내어 읊조려 봅니다.
햇빛……감사……바람……감사……꽃……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