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러브 스토리이자 정절과 의리의 주인공으로 전해오고
있는 16세기 '묏버들 해 것거…'의 기생 시인 홍랑과 당대
문장가였던 고죽 최경창(1539~1583)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으며,
두 사람의 묘소는 후에 자손들에 의해 같은 장소에 모셔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 산 114에
있는 것으로 본지 취재 결과 밝혀졌다.
홍랑의 '묏버들…' 원본과 최경창의 답시 원본 등이 보도된 후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과)는 조선 중기 학자 남학명(1654~?)의 문집
'회은집'에서 홍랑-최경창 관련 내용을 발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두사람 후일담을 소개했다.
지금까지 두 사람 관계에 대해서는 홍랑이 1574년 봄 함관령(함흥과
홍원 사이)에서 최경창을 이별하며 '묏버들 해 것거…'란 한글
시조를 지었고, 이듬해 최경창이 와병 중이란 것을 듣고 일주일
밤낮을 걸어 상경해 만났다는 것까지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정교수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최경창은 그로부터 7년 후
함경도에 벼슬을 제수받아 부임 중 객관에서 죽었는데 홍랑이 그의
시신을 좇아 서울로 왔고, 파주에 있는 무덤을 지킨 것을 밝혀졌다.
정교수가 공개한 「회은집」에는 홍랑의 행적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고죽의 후손에게 들으니 홍랑은 고죽이 죽은 뒤에 스스로 얼굴을
지저분하게 하고 파주에서 묘를 지켰다 한다. 임진왜란 중에는 고죽의
시고를 등에 지고 피난 가서 병화에 소실됨을 피할 수 있었다.(…)
(또 그들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유일자). (…) 홍랑이
세상을 뜨자 고죽의 산소 아래 장사를 지냈다.'
한편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 산 114에 있는 해주 최씨
선산에는 최경창과 본처 선산 임씨의 합장 묘가 있으며 그 바로 아래
홍랑의 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인 홍랑지묘'의 비문에는
"고죽이 후일 종성 부사로 함경도에 파견됐으나 부임과 함께 경성
객관에서 돌아가시자 홍랑은 영구를 따라와 시묘했다. 이어 홍랑이 죽자
문중이 합의해 고죽 선생 묘 앞에 후장했으니 홍랑의 인품을 가히
알지니라"라고 돼 있다.
그러나 취재 결과 최경창 부부 묘나 홍랑의 묘는 원래 다른 곳에
모셔졌다가 이곳으로 이장돼 온 것으로 밝혀졌다. 고죽은 다율리에서
얼마간 떨어진 월롱면 영태리에서 태어났으며 묘소 역시 그 곳에
마련됐다. 지난 1969년 정부가 영태리 고죽의 무덤 자리를 군용지로
선정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된 것이다. 파주가 고향인
홍승희(56) 시인은 "원래 묘소가 있던 영태리에는 지금
미군부대가 들어서있다"고 말했다.
고죽의 후손으로 묘소 인근 청석 초등학교 교장인
최은호(59)씨는 "이장에 참여했던 부친으로부터 홍랑의
무덤에서 옥으로 된 목걸이, 반지, 귀걸이, 옷 등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아마도 인부들이 가져갔는지 유물들은 최씨 집안에 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묘소로부터 100여 떨어진 동네 입구에는
전국국어국문학 시가비건립동호회가 세운 홍랑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