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K리포트: 북한의 외화벌이

안녕하십니까. 강철환 기자입니다.

오늘은 북한의 외화벌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외화벌이’의 등장

북한주민들이 외화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제 판단으로는 아마도 1985년 경 부터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초부터 재일 교포들이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면서 평양시에 외화상점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식량공급이나 상점에서의 생활필수품 공급상황은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이였습니다. 1985년을 넘기면서 동구권 붕괴와 더불어 북한경제가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공급이 끊기고 생활필수품공급이 연기되거나 중단되는 사태가 빈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198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암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국정가격(국가에서 정한 가격)과 암시장의 가격이 10배 이상 차이가 나기 시작하자 상업관리소나 당간부들의 부패가 심각해 졌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생활필수품들을 국정가격에 빼돌릴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업관리소 일꾼들이 부정축재혐의로 감옥에 가거나 공개 처형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려워지는 국가사정에도 아랑곳없이 간부들의 부정축재는 심해지고 일반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마다 외화상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북한화폐는 일반북한돈과 외화바꿈돈표 두가지가 있습니다. 외화바꿈돈표는 외국인들만 사용할 수 있지요. 미화 100$면 외화바꿈돈표 180~200원 정도입니다.

환율에 따라 조금씩 변동이 되지만 대략 이 정도 선에서 거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바꿈 돈표 1원에 일반북한돈 35~40원정도로 암시장에서 거래되면서 외화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관심은 급격히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해외에 친척을 둔 교포들은 외화를 손쉽게 만질 수 있었고 송금을 받는 교포들의 생활수준은 일반주민들과 크게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려고 양복천 한 벌 사려고 해도 외화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주민들의 외화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은 전국에 생겨난 외화벌이 사업소(39호실)와 당직속외화벌이 기관(38호실)입니다. 이 두 기관은 전국민을 외화벌이에 총동원하였습니다. 1985년 이후부터 시작된 평양시의 대규모 건설사업은 막대한 외화수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때 건설된 대형경기장들과 극장들, 인민대학습당과 같은 어마어마한 건물에는 천문학적인 외화가 투입된 것입니다.

◆ 외화벌이에 총동원되는 사람들

각 기업소, 협동농장, 군부대에 이르기까지 외화벌이 할당량이 떨어졌습니다. 외화벌이를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연결시켜서 이름도 '충성의 외화벌이 운동’으로 만들고 집단별 개인별 경쟁까지 시켰습니다. 나중에 고등중학교 학생들까지 외화벌이에 동참하였습니다.

이른봄만 되면 강변은 사금 채취하는 일반주민들과 학생들로 뒤덮입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강바닥을 파고 또 파 모아진 사금(砂金)은 충성의 표현이 되어 당에 바쳐집니다. 김부자가 명절마다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준다는 교복은 사실은 공짜가 아닙니다. 학생들이 사금 캐기를 통하여 자기 몫의 몇 배는 벌어다 준 것을 좀 떼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캐는 사금도 무시 못합니다.

사금(砂金)과 송이버섯은 북한의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민군대장이라는 사람이 송이버섯 3t을 선물로 가지고 서울로 와서 사람들이 놀란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송이는 인공재배가 안되어 일년 중에 가을에만 수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송이를 먹는 자는 반혁명분자"라는 말까지 만들어 놓고 송이철만 되면 송이가 나는 지역에서는 민·관·군이 총동원되어 송이채취에 나섭니다.

민간에게는 송이3㎏당 나일론 단복(체육복) 한 벌을 포상으로 주기도 합니다. 그 이하일 경우에는 나일론 양말을 무게에 따라 지급합니다. 그나마 포상이 있어서, 사람들은 송이철만 되면 나일론 단복 하나 입어 보려고 송이채취에 전력을 다합니다. 사실 전문채취꾼이 아닌 사람은 하루에 송이 한 두 개도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탕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전문채취꾼들 중에는 하루에 3㎏이상 채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충성도를 인정받는 동시에 체육복도 몇 벌씩 획득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삽니다. 그래서 초보들은 숨어 있다가 이런 사람들이 출발하면 몰래 뒤따라가기도 합니다.

1985년까지만 해도 단체나 기업소 등에서 몇 명씩 동원하여 외화벌이를 하였지만 1987년 이후부터는 외화벌이 철이 되면 온 나라가 열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혈안이 되었습니다.

◆ 여러가지 외화벌이 품목들

이른 봄에는 두릅나물 채취가 외화벌이 1순위에 올라갑니다. 고급산나물로 일본에서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 두릅철만 되면 온 산과 들에 사람들이 붐빕니다. 이밖에도 고사리, 고비, 황기, 세신, 미치광이풀과 같은 고급산나물과 약초들, 다릅나무와 같은 고급목재들도 외화벌이에 이용됩니다.

다릅나무는 일본에서 절 기둥이나 고급가구용으로 인기가 좋아 북한의 온 산과 들의 다릅나무가 무참히 잘리어 나갔습니다. 다릅나무는 비교적 높은 산의 험한 골짜기에서 자라고 있어 채취하기가 상당히 힘든데다가 그 기준도 직경30㎝ 이상, 길이 5m이상의 곧은 나무라야 합니다. 여기에 동원된 사람들은 엄청난 고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흥남앞바다에는 전국각지에서 잘려온 다릅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곤 했습니다.

이밖에도 해삼이나 낙지(우리말로는 오징어)같은 어족도 외화벌이에 이용되고 있으나, 이것들은 주로 개인들이 중국상인들과 불법적으로 거래하는 품목들입니다. 어부들이 이러한 품종들을 획득을 하면 외화벌이 사업소나 당에 바쳐야 하지만 별로 이득이 되는 것이 없어서 개인장사꾼들과 현장에서 밀거래를 합니다. 바닷가에서 받아간 물건은 국경으로 가면 몇 배의 가격으로 거래되어 이러한 거간꾼들도 많은 외화를 벌고 있습니다.

◆ 외화벌이로 인해 생겨난 비리들

1980년 후반부터 각 시, 도, 군소재지마다 외화벌이 사업소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에서는 채집한 물건들을 수집·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외화벌이 대가로 나오는 여러 가지 고급물건들(데트론 양복천, 단복, 고급우산, 고급신발, 전자시계 등)을 관리합니다. 그 덕분(?)인지 이 곳에서 일하는 외화벌이 일꾼이라는 직책이 당간부 이상으로 좋은 자리로 부상하였습니다.

이들은 기관, 기업소 뿐 아니라 개인들과의 물품교환을 통하여 불법으로 외화벌이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발생한 상당한 차익을 외화벌이 일꾼들이 독식하게 되어 재일교포 다음으로 외화를 잘 쓰는 새로운 부유층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사회안전부와 검찰은 이들의 비리를 캐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대부분 이들에게 매수되어 엄청난 외화를 착복하고도 살아남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외화벌이 일꾼들 대부분은 출신성분이 좋은 군 특수부대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이들을 함부로 잡아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선·후배들이 당·정·군의 요직에 있기 때문이죠.

가끔은 너무나 눈에 띄게 잘 산다든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다든지 하여 시범케이스로 공개재판을 하기도 합니다. 횡령 액수가 클 경우에는 공개처형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아주 운없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 물고기와 물고기 잡는 법

북한주민들은 외화벌이라는 말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입니다. 보통일보다 외화벌이에 동원되면 일이 훨씬 힘들기 때문입니다. 당에서 시키니 안할 수도 없고 하자니 힘들고... 과거처럼 열심히 하려는 열의가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화는 엄청나게 필요하고 나올 구멍은 없기 때문에 주민들을 동원한 외화벌이는 북한의 근본적인 개혁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는 외화벌이와 북한주민과의 악연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최악의 경제난이었던 1998년에 북한이 벌어들인 외화수입은 8억 5천만달러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한 나라의 교역 액수치고는 너무나도 적어 보입니다. 북한이 더 이상 주민들을 동원하여 사금이나 송이, 두릅과 같은 것으로 외화벌이 하는 것이 한계점에 다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지나친 외화벌이 동원으로 자연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져 자원이 점점 고갈돼가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이제는 지칠대로 지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북한 당국도 체제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기업을 끌어들이는 것을 보면 더 이상 돈 나올 구멍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 모양입니다. 이제 남은 곳은 남한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고 사실상 그 길 외에는 다른 뾰족한 대안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이고도 확실한 개혁개방이 되지 않고서는 사사건건 간섭하고 통제하는 북한사회에서 자본주의의 기업이 정착하고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과거 조총련산하 많은 재일 교포 기업인들이 북한에 진출했다가 거의 다 망한 사실이 작은 규모이지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일반 북한주민들은 한푼의 외화를 벌기 위해 죽을 고생을 다하면서 외화를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외화를 물쓰듯하는 방북자들이나 남한기업인들을 보면 좀 황당한 생각을 할 것입니다. 저렇게 쉽게 버는 외화도 있다고 말입니다. 요즘 북한의 당간부들이나 주민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방북자들에게 터무니없는 액수의 돈을 요구하는 사례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전에는 재일교포 상공인들이 조국에 충성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그냥 북한에 갖다 바쳐 당 간부들에게 '이상한 버릇'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남한 기업과 사람들이 그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북한 사람들이 어느 체제에서나 돈버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의 결과임을 북한 주민들에게 꼭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작정 물고기를 줄 것인지,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할 것입니다.

( 강철환 드림 nkch@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