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1월 18일자 경제면 주요 예정기사
△ 현대건설, 1조 자구안 마련 진통
△ 외국인 투자자, 서울 도심빌딩 매입붐
△ 미국 멜런 뱅크 회장 인터뷰
△ 기업구조조정 지원단(재경부 차관 주재) 3차 회의, '11.3' 부실기업퇴출 조치, 대우차 부도에 따른 협력업체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한 방안 논의.
△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가동중단 일주일째
△ 주식시장 약보합세
■ 취재일기: 이근영-몽구 만남
□ 다음은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을 담당하는 윤영신 기자의 이메일입니다.
▶ 2000/11/17
안녕하십니까. 윤영신입니다.
겨울이 확실히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런 계절에는 실내 환기에 주의하지 않으면 감기에 잘 걸리니 조심하세요. 오늘은 현대사태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지난 16일 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을 만난 것에 대한 반응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 위원장과 정몽구 회장의 만남은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처럼 현대건설 문제를 해결하는 일격이 됐다는 긍정론과, 금감위장이 재벌총수를 직접 만나 현대건설 지원을 요청한 것은 정부가 피했어야할 방법이었다는 비판론이 맞서고 있죠. 금감위 출입 기자들은 이 위원장이 몸을 던져 일을 해결하려는 충정과 노력은 십분 이해하지만, 방법론에서 문제가 있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16일 밤 두 사람의 만남은 극비리에 이뤄졌습니다. 많은 기자들이 둘의 만남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근영 위원장과 정몽구 회장은 둘다 저녁 7시쯤 사무실을 떠났죠. 이근영 위원장은 일단 집으로 퇴근하는 바람에 비서실장과 수행비서도 이 위원장과 몽구 회장의 만남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부 기자들은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과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 입구에서 두 사람의 퇴근 후 동선(動線)을 체크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양재동쪽에서 일부 기자들이 정몽구 회장의 동태를 감지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희 신문 독자분들에겐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 저와 제 후배도 둘의 만남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후배기자에게 수행비서를 마크하라고 지시했고, 저는 비서실장과 고위 간부들을 밤늦게까지 체크했습니다.
다음날 알고 봤더니, 금감원에 같이 출입하는 제 후배기자(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는 수행비서와 저녁식사를 하고 술한잔까지 걸쳤더군요. 이근영 위원장이 진짜 비서실장과 수행비서까지 속인 것인지, 저와 제 후배가 너무 순진했는지?.
제 후배는 그저 "죄송합니다. 윤선배"한마디 하더군요. 아무튼 이튿날 저와 제 후배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녔습니다. 마침 저희 경제과학부 전체 회의가 열리는 날이어서 저와 제 후배는 선후배 동료들로부터 '격려'를 듬뿍받는 행운까지 얻었답니다. 이 위원장과 정몽구 회장의 만남은 결국 일부 언론에 들키고 말았습니다. 정몽구 회장 측에서 슬쩍 흘렸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확인할 수 없는 일이죠.
사실 정몽구 회장 입장에선 이 위원장과 만남이 세상에 알려지는게 유리할 것입니다. 어차피 동생(정몽헌 회장)을 도와줄 바엔 생색도 내고, 금감위원장과 독대함으로써 정부가 정몽구 회장에게 뭔가 빚을 지고있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게 유리하죠. 또 기회있을 때마다 MK도 퇴진하라고 귀찮게 구는 정부와 채권단으로부터 회장직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죠.
반대로 이근영 위원장 입장에선 몽구 회장과의 만남을 들킨 것은 일종의 천기누설입니다. 명색이 대한민국 구조조정본부 총사령관인데, 재벌총수를 만나 다른 기업(현대건설)을 도와달라고 협조를 요청하는 모양새는 어색합니다. 특히 외환위기이후 정부와 국민들이 그 고통을 참으며 추구해온 재벌개혁의 대원칙을 구조조정 사령관이 스스로 어긴 꼴이 됐기 때문에 한마디로 이 위원장은 스타일을 구긴 셈이죠. 이 위원장과 몽구 회장의 만남은 앞으로 언론이 두고두고 정부의 재벌정책을 비판할 때마다 써먹는 단골 메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 위원장은 이같은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몽구 회장을 만났을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다른 장관들 같으면 이 위원장처럼 돌쇠식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개 관료들은 항상 훗날을 먼저 계산하는 습성이 강하기 때문에 결코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하지않습니다. 그런데 이 위원장은 자신을 믿어주는 상관에겐 몸을 바쳐서 일하는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오로지 목적 달성을 위해선 다소 원칙에 어긋나더라도 황소같은 추진력으로 문제의 끝을 보고야마는 성격입니다.
이 위원장은 "공적자금을 한푼이라도 줄여서 국민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정몽구 회장을 만났다"고 설명했습니다. 현대건설을 출자전환이나 법정관리 방식으로 처리하면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 투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현대 문제는 형제들 스스로 해결케 한다는 전략을 밀고나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결국 이 위원장의 전략은 적중,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이 4000억원의 유동성을 지원하는 자구계획을 끌어내는데 거의 성공단계에 와있죠.
국민들 입장에서도 현대가 가족들이 힘을 합쳐 현대건설을 살리는 것이 가장 유리합니다. 현대건설이 '꽈당' 무너지면 협력업체 문제, 실업자 문제, 해외공사 문제, 자금시장 불안문제 등 경제전반에 미치는 충격은 엄청날 것입니다. 출자전환을 해서 대주주와 경영진을 교체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라고 정부는 판단했죠. 국내 건설업체들은 특성상 오너의 입김이 공사현장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주인과 핵심 경영인들이 바뀌면 공사현장부터 무너져 내리는 속수무책의 도미도 현상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대건설을 정씨 가족들이 십시일반해서 스스로 살아나게 하는게 최상의 시나리오였죠. 정부가 이달 초 부실기업 처리방안을 발표하면서 현대건설을 법정관리에 넣거나, 출자전환을 통해 경영권을 박탈하겠다는 것은 궁극적인 희망사항은 아니었다는 얘기죠. 아무튼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정부 의도대로 잘 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근영 위원장은 지난 6일 청와대에 가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금융·기업구조조정 방안을 보고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이 위원장의 손을 꽉 잡고 이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누군가 특히 윗사람이 자신을 믿어주고 힘을 실어주는 격려를 하면 흥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하고 몸을 바쳐서 일로 매진하기 마련입니다.
이 위원장도 김대중 대통령의 강한 신임 덕분에 더욱 자신감을 갖고 현대건설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려 한 것 같습니다. 또 자금시장의 조기안정을 위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정몽구 회장을 만나고 정몽준 고문에게 전화를 해서 정씨 형제들을 화해시키고 도움을 요청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몽구회장과 만난 사실을 들키지 말았어야 했죠. 언론도 이 위원장이 팔을 걷고 나서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개되버린 사실을 덮을 수 없는 것 또한 언론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저희신문을 포함한 일부 언론들이 오늘(17일) 아침자에서 정부정책의 원칙에 관해 비판을 했습니다. 특히 저희신문 신경무 화백이 그린 만평은 압권이었다는 평입니다.
어제 저녁 가판에 나온 저희 만편을 본 이근영 위원장은 "다른 신문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이것(조선일보 만평)만은 꼭 해결하라"고 부하직원들에게 지시했고, 고위 간부를 포함한 직원들이 만평을 고치려고 밤새 백방으로 뛰었답니다. 그래서 저희 신 화백께서 일부 수긍이 가는 요구를 수용해 표현을 약간 바꿔주긴 했지만, 만평의 골자는 그대로 살려서 오늘 아침자에 내보냈답니다.
혹 궁금하시면 오늘 아침자 2면에 실린 만평을 참고하세요. 그리고 만평이란 (우리가 외국신문의 캐리커처에서도 보듯) 원래 인물과 현상의 특징을 극대화해서 풍자하는 표현법이니, 너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그러려니 하고 웃고 넘기시는게 좋지 않을 까 생각해봅니다.
( 윤영신 올림 ysyoon@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