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재일기: 거래소/증권업협회 데모
□ 다음은 증권시장을 담당하는 한윤재 기자의 이메일입니다.
▶ 2000/11/15
안녕하십니까. 머니섹션에서 매일 여러분을 만나뵙고 있는 한윤재입니다.
오늘은 증권가의 추투(秋鬪) 소식을 들고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요즘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와 증권업협회는 80년대 대학캠퍼스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선물시장 강제이전 자본시장 붕괴된다' '저지 코스닥 분리음모, 타도 신관치금융' 같은 현수막이 증권거래소와 증권업협회 건물에 커다랗게 걸려 있고, 건물 안에서는 노조원들이 붉은 머리띠까지 두르고 철야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로비를 차지하고 서 있는 앰프에선 '출정가', '민주노조가'같은 귀에 익은 운동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농성을 벌이고 있느냐구요? 우선 증권거래소는 주가지수 선물을 부산에 있는 한국선물거래소로 옮기겠다는 정부의 방안에 강력 반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증권업협회는 코스닥 업무를 코스닥위원회로 이관하겠다는 정부의 코스닥 분리방안에 반발하고 있지요. 둘다 정부의 시장개입을 강력히 규탄하면서 정부가 예전 관치금융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증권거래소의 경우엔 이번 농성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해 3월에도 지수선물 이관 문제가 불거졌을 때 증권거래소 앞마당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얼마나 오래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때도 상당히 장기간동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농성을 했었습니다.
사실 증권거래소와 증권업협회는 둘 다 비영리 공익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증권사 등 회원사로부터 회비를 걷어 운영되는 것도 마찬가지이죠. 비영리 공익단체라는게 대부분 그렇듯 조직원들도 굉장히 젠틀하고 일처리에도 여유가 넘칩니다. 그런데 요즘 거래소와 협회 분위기는 다소 긴장감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농성장에서 만나지 않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웃는 얼굴 만나기가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증권분야를 취재하고 있는 제 입장에선 일단 두 기관의 입장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증권거래소의 경우 3년이 넘는 세월동안 피땀흘려 개발하고 안정화시킨 주가지수 선물이 어느날 갑자기 부산으로 이전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입니다. 여기서 어느날 갑자기 라는 표현은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밝혀드리면, 대통령 공약사항으로 지수선물 이관이 결정된 부분을 말합니다.
DJ정부는 집권후 부산지역 정서를 감안해 선물거래소를 부산에 만들었고, 앞으로 모든 선물 거래를 선물거래소에서 이뤄지게 하겠다는 게 대통령의 공약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국도 선물거래소는 뉴욕이 아니라 시카고에 있지 않느냐. 선물거래소를 어차피 따로 만들어야 한다면 이왕이면 지역정서가 좋지 않은 부산에 만들어주자'는 식으로 결정됐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여의도 증권가에선 그런 이야기에 대해 한마디로 넌센스라는 입장입니다. 미국 시카고야 원래 밀이나 석유같은 상품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던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선물거래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게 된 것인데, 굳이 선물거래소를 새로 만들면서 다른 장소에 옮겨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증권업협회의 경우도 그동안 코스닥시장이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을 때에는 별로 아는 척도 않하고 있던 정부가 갑자기 재경부 출신 전직관료들이 사장이나 위원장으로 있는 코스닥위원회나 코스닥증권시장에 코스닥 업무 전체를 떠넘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서 분기탱천입니다. 더군다나 그동안 코스닥등록과정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 심사업무를 공정하게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에 코스닥 등록과정의 공정한 운영을 위해 업무를 이관한다고 하니 협회입장에선 가만있을 수만은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만, 며칠째 농성 현장을 바라보면서 제가 느낀 의문점은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주가지수 선물을 여의도 증권거래소에 남겨두고, 코스닥증권 업무중 일부를 협회가 계속 가지고 있을 경우 투자자들은 어떤 이익을 볼 수 있는가'라는 겁니다. 증권거래소나 증권업협회는 정부가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시장에 개입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정부가 개입해서 과연 투자자들이 어떤 불이익을 보게 되는가 하는 점에는 아무런 지적이 없는 상태입니다.
오히려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 상태를 유지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왜 정부가 개입하는가 하는 정도만의 논리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투자자들은 어떤 시각으로 이런 사태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거래소나 협회가 드러내놓고 주장하지 않고 있는 문제점은 인원의 조정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거래소의 경우 주가지수 선물이 부산으로 가버린다면 전체 인원의 3분의 1 정도 되는 관련분야 종사자들이 부산으로 옮기거나 거래소를 나가게 된다고 합니다.
증권업협회도 70여명이나 되는 코스닥 관련분야 직원들이 협회를 떠나게 됩니다.사실 제가 만난 노조원중 한 분은 "정부가 이미 실천의지를 가지고 있는 상태인데, 이제와서 사태를 돌리기엔 역부족이라는 건 잘알고 있다. 다만 불안해하는 관련분야 종사자들을 위해 정부가 투명한 원칙이라도 제시해주면 좀 좋겠냐"고 지적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선 일단 아무 말씀도 안드렸지만 그렇다면 지금처럼 정부의 신관치금융이니 자본시장 개입만 지적할 게 아니라 보다 솔직하게 거래소나 협회 직원들의 거취문제도 들고 나와야 설득력을 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거래소나 협회의 대표분들께서 보다 명확한 입장 표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배창모 증권업협회장은 지난 9월 자리를 걸고 코스닥업무를 지키겠다고 천명했습니다. 하지만 노조원들이 철야농성까지 들어간 현 시점에선 별다른 입장 표명이 없는 상태입니다. 박창배 증권거래소 이사장도 지난해 3월엔 기자실에 내려와 주가지수 선물을 부산으로 가져가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밝히셨지만, 이번에는 아직까지 노조원들의 농성에 대해 확실한 입장 표명이 없으신 상태죠.
요즘 증시 상황은 거의 IMF경제위기 때와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지난해 반짝장세에서 큰 돈을 벌었던 투자자들도 올해들어 조정이 계속되면서 이미 먹었던 돈을 전부 토해낸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증권관련 유관기관들이 어지러운 모습을 보이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그런 사태를 지켜보는 투자자들 마음이 편할리야 없습니다. 물론 정부의 무원칙한 태도와 바뀌지 않는 관치금융 작태는 투자자들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증권거래소나 증권업협회도 정부의 성숙하지 못한 정책집행을 비판하고 해결하는 자세가 보다 성숙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가뜩이나 노정갈등이 무르익어가고 있는 요즘, 굳이 증권관련 유관기관들까지 분위기 형성에 동참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