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의 신작소설 「진술」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책을 집었다가
단숨에 내쳐 읽었습니다.「진술」은 추리소설처럼 시종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 한 청년의 죽음을 형사들이
뒤쫓는 것처럼, 「진술」은 철학과 교수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형사의 질문은 없고 주인공의 진술만 있는 독특한 구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절묘합니다. 그러나 그 진술은 앞뒤가 맞지
않고, 꿈과 현실이 뒤섞여 있지요.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주인공은 8년이 지나도록 아내가 살아있다는 환상 속에서 삽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지고지순, 완전한 사랑을 꿈꿉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노국공주를 못잊어 그 환영이라도 만나려 했던 공민왕의
사랑이야기』를 닮았습니다. 주인공은 꿈을 현실로, 현실을 꿈으로
혼동합니다. 장자의 「나비의 꿈」을 연상케 하지요.

해운스님의 죽비를 맞고 깨어난 주인공은 죽은 아내가 곁에서 팔을 베고
쌔근쌔근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박종화의 장편 「다정불심」에서
신돈이 신통력을 부려 죽은 노국공주를 살려내는 것처럼, 「진술」에서는
해운스님이 죽은 아내를 살려내는 것이지요. 해운스님은 생사일여,
몽매일여를 말합니다.

「진술」속의 사랑은 그러나 너무나 완전해서 부서지기 쉽습니다. 연인은
칩입자(전처)를 피해 「옷장 속」으로 숨기도 하고, 부모반대를 피해
외국으로 달아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정상의 궤도, 관습의 틀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아내는 『치맛자락을 걷어올려
남동생의 코를 닦아주고 있는 사려깊은 누나』이며, 매일 밤 집에 돌아온
남편의 『머리를 빗겨주는』 아내지요. 그런 남편은 현실의 칼을 들이대
환상을 깨는 처남을 죽이고 맙니다. 「병적 애도반응」이라는 병명을
가진 『착하고 마음이 여린』 주인공은 도저히 아내가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번 주말 못이기는 체 하일지가 부리는 마술에 한번 걸려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이번 주는 「진술」외에도 박완서 최일남 박범신 등
묵직한 작가들이 모처럼 신작을 잇따라 출간했습니다.「최루가스」가
난무하는 소설시장에 이처럼 반가운 소식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