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통신장비 제조업체인 「루슨트 테크놀러지」가 최근 계속되는
실적 부진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주가가 80달러대에서 20달러대로
추락하는가 하면, 급기야는 지난주 최고경영자(CEO)를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복사기의 대명사인 제록스는 상황이 더 나빠 파산 신청설까지
나돌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인 루슨트와 제록스가 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두 기업에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원인이 있다. 바로 연구개발 성과를 제품으로 제대로 연결하지
못하는 무거운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루슨트의 벨연구소(Bell Lab)는 연구원 수 2만7000명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사람이 11명이나 되는 세계적인 연구소이다. 트랜지스터를 비롯해
레이저·광섬유·셀룰라·이동통신전화기 등이 여기서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연구개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과실(과실)은 다른
기업들이 향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의 예로, ATM 교환기에 사용되는
핵심 칩은 루슨트에 의해 개발되었지만 이 칩을 이용해 고품질의 ATM
교환기를 만들고 돈을 번 것은 아센드(Ascend)라는 회사였다. 기회를
놓친 루슨트는 시장 경쟁력 확보를 위해 200억달러를 들여 이 회사를
사야만 했다.
제록스의 경우도 비슷하다. 제록스는 파크(PARC)라는 유수의 연구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 연구소는 특히 컴퓨터 관련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마우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이더넷,
클라이언트·서버 아키텍처, 객체지향적 프로그래밍, 레이저 프린팅과
같은 오늘날 컴퓨터 환경에서 없어서는 안 될 수많은 기술이 이
연구소에서 개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록스 또한 이러한 연구
성과를 시장에서 결실 맺는 데는 서툴러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반면, 세계 최대의 네트워크 장비 제조업체인 시스코는 매출에 비해
연구개발에 너무 작게 투자하는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다. 시스코는
대신 M&A(인수합병)를 통해 기술과 제품을 확보함으로써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시스코는 향후 6~12개월 이내에 시장에 출시될 수 있는 차세대
제품을 보유한 업체로서 시스코를 보완해 시장에서 1·2위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벤처기업을 M&A 대상으로 잡고 있다. 또 M&A를 할 때 '기술
신봉자와는 M&A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시장을
중시한다.
루슨트와 제록스, 그리고 시스코의 예는 time-to-market(상품을 적기에
시장에 내놓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벤처식 기민함이 중요한 경쟁력의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향후 기업 경영방식의 변화 방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정일재·LG경제연구원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