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영화제
■어둠 속의 댄서
올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라스 폰 트리에의 디지털 뮤지컬.
아이슬랜드 출신 록 가수 비욕이 음악과 주연을 맡았다. 체코에서
미국에 이민 온 셀마는 뮤지컬 배우가 꿈이지만, 현실에선 시력을
잃어가는 가난한 홀어미. 자기 처럼 시력을 잃어가는 아들의 눈
수술을 위해 조금씩 돈을 모으던 그에게 어느날 비극이 일어난다.
프레스 공장, 목재 야적장, 가난한 부엌, 심지어 감옥까지, 셀마가
꿈꾸면 모든 곳이 아름다운 무대로 변한다. 환상과 비극, 감상이
뒤섞인 영화. 칸에서는 극단적인 찬반이 맞섰다.
■이층에서 들려오는 노래
'칠판'과 함께 올 칸에서 심사위원상을 공동 수상한 이 영화는
스웨덴의 괴짜 감독 로이 앤더슨 작품. 할리우드식 내러티브는 물론
없고, 에피소드들도 서로 적절한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 묵시록적
분위기가 두텁게 깔린 이미지들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예수가 못박힌 실물 크기 십자가상, 거리를 꽉 매운 자동차
행렬, 검은 옷차림의 중년 남자들, 북구적 음울함과 은유로 가득찬
이미지들이다.
■오 형제! 나의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의 귀향서사시 '오딧세이'를 30년대 공황기
미국 남부로 번안한 코엔 형제식 유머극. 감옥에서 중노동에 지친
에버렛 율리시즈 맥길은 숨겨둔 황금을 찾으러 가자고 얼뜨기 두
동료를 꼬셔 탈옥한다. 귀향 길에서 침례식을 만나고 가짜 가수가
되는가 하면 사기꾼에게 엄청 당하기도 한다. 조지 클루니가 클라크
게이블 흉내내는 뺀질이 맥길역을 맡았다. 미국 남부에서 발원한
컨트리송을 실컷 들을 수 있다.
■본드를 마시는 아이들
좀처럼 보기 힘든 베네주엘라 영화. 남미 영화들이 자주 다루는
거리의 아이들과 망가진 가정 이야기다. 알콜 중독자인 의붓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겨난 올리버. 거리의 아이가 된 그는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소년들 패에 끼게 된다. 추위와 굶주림,
폭력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이들을 버텨주는 것은 본드. 화면은
때론 거칠고, 이야기 흐름도 매끈하지 않지만, 생생한 뒷 골목
이야기가 가슴을 친다.
■미지의 코드
위악적 폭력으로만 일관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퍼니 게임'은
잊으시길. 미카엘 하네케는 이 영화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담담하게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젊은 여배우 안느, 전쟁
사진만 찍는 카메라맨 조르주, 청각장애아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아마도 등 다양한 인물들의 일상을 듬성듬성 관련지으며 담담히
그려나간다. 별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짤막한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형식 사이사이에 반추를 요구하듯 암전 장면을 넣는
편집이나, 웬만해서는 미동도 않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는
낯설지만 충분히 인상적이다.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했다.
■4월의 장교들
이런 쿠데타도 있다. '성공한 쿠데타' 신화 속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고, 그래서 현실감 없는
영화로 보이겠지만,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데야 어쩌랴. 1974년,
서유럽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포르투갈. 독재 정부는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에 청년들을 몰아넣고 국내에선 정적을
제거하는 불법 체포와 고문을 자행한다. 4월24일 밤, 드디어
군부가 일어서는데, 이들의 당초 계획은 사뭇 어긋나기 시작한다.
'펄프 픽션'에 출연했던 눈이 동그란 여배우 마리아 드 메데이로스가
정치색 짙은 영화를 부드럽게 연출했다.
■당신의 영원한 친구, 해리
여름 휴가 길, 에어컨도 없는 차에서 아이들은 덥다고 빽빽대고
노부모는 휴가지로 찾아오겠다고 성화다. 휴게소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해리. 문학 청년이던 주인공의 고교 시절을
꿰뚫어 기억하고 있는 해리가 문제 해결사로 나선다. 풍요로운
프랑스 시골의 여름은 그러나 너그럽고 풍족하기만 한 줄 알았던
해리의 속내가 드러나면서 악몽으로 변한다. 감독 도미니크 몰은
블랙 코미디 형식을 빌어 인간의 욕망과 관용의 한계를 파헤친다.
■내 이름은 리타
좌익 테러리스트 리타는 애인 앤디와 함께 70년대 서독에서
활동한다. 뒤를 쫓는 경찰의 움직임을 느끼자 리타는 홀로 동독으로
잠입한다. 공장 노동자로 새 생활을 시작하지만 서독 TV에서 그녀를
특집으로 다루자 또다시 피신한다. 올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된 독일
영화 중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작품. '양철북'에서 히틀러
시대를 우화적으로 다뤘던 폴커 슐렌도르프는 한 좌익 테러리스트의
삶을 통해 통일 전후 독일의 현대를 정면으로 다룬다. 쫓겨다니는
자의 내면을 파고든 심리극인 동시에 여성간의 유대에 포커스를
맞춘 여성영화이기도 하다. 비극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이지
라이더'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