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의 탯줄인 미국 서부 팔로 알토(Palo Alto)시의 스탠퍼드
대학 캠퍼스 곳곳에는 묘비명을 연상시키는 글들이 많다.

「사랑하는 남편 르랜드 스탠퍼드의 이름으로.」
「아버지 헨리 마이어를 위해 두 딸 엘리스와 올가가.」
「친구 지니 매카시를 그리며 그녀의 친구들이.」

중앙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루실 그린 도서관과 헨리 마이어 도서관은
물론, 큰 건물 입구에는 건물을 지어 헌납했거나 학교에 큰 돈을 기부한
이들의 초상화와 이들을 추념하는 글들이 학생들을 맞는다.

대학 중앙에 있는 설립자 르랜드 스탠퍼드 기념 교회. 당대 미국
최고의 갑부였던 그가 이 대학을 세우고 2년 만인 1893년에 죽자,
스탠퍼드 부인은 전 재산을 대학에 헌납하고 남편을 기리는 대학을
세웠다.

교회 양쪽 벽에는 스탠퍼드 부인의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를 기리는
글이 큰 화강암 판에 새겨져 있어 교회가 마치 가족묘지 같다는 느낌을
준다.

후버 대통령이 소장하고 있던 희귀 도서와 외교문서 등을 기증해 세워진
후버 연구소. 후버 기념관 입구에는 돈을 낸 친구들과 미국 기업들의
이름들이 벽 하나를 빽빽이 메우고 있다. 연구소 앞뜰에는 1m가 채 되지
않은 조그마한 원형 조형물이 후버를 기리고 있다.

「엔지니어, 정치가, 공무원, 작가 허버트 후버(1874~1964).」

후버 가족들이 골랐다는 조형물 위의 글귀에는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포함돼 있지 않다.

스탠퍼드 대학 박물관 전시실에는 이집트의 미라,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 현대 미국화까지 다양한 예술품이 가득하다. 전시실 입구에서
우리는 평생 모아온 값비싼 소장품을 내놓은 이들의 이름을 만난다.
나파 밸리에서 가장 큰 포도밭과 양조장을 소유한 몬다비, 수천억원에
이르는 로댕 조각품을 기부한 캔터….

크고 거창한 건물에만 기부자들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타이거 우즈가 학부생 시절 골프실력을 연마한 대학 뒤편의 골프장.
18홀 벤치마다 대학에 돈을 기부한 이들의 이름이 청동판에 적혀 있다.
간혹 금혼식을 기념하거나, 세상을 뜬 친구의 이름을 적어놓은 명패도
눈에 띈다.

이 대학 박물관에 정기적으로 운영자금을 내고 있는 레이먼 스툴츠씨.
여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겨울은 플로리다의 집에서 나는 전형적인
미국 상류층이다. 70대인 그는 자신의 재산 수십만달러를 공익재단에
기부해 니카라과 의료지원 사업과 자연보호단체를 돕고 있다.

『미국 사람들이 좋은 명분을 위해 기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유산에 55% 이상의 고율 세금을 부과하는 과세체계다. 세금없이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돈은 65만달러 정도다. 탈세할 구멍을 찾는
게 불가능하다면 누구나 좋은 일에 기부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미국 대륙횡단 철도를 부설한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 르랜드 스탠퍼드,
미국 31대 대통령을 지낸 후버의 시신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기억하는
미국인은 별로 없다. 스탠퍼드 대학 교정을 걷다 보면 죽어서 자신의
이름을 남겨야 할 자리는 호화로운 무덤 앞의 거대한 비석이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팔로 알토(미 캘리포니아주)=김연광특파원 yeonkwa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