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공공재(public
goods)의 창출과 배분이다. 이러한 명제는 공공재의 제공을 위해
개인들간의 계약을 통해 태어난 '리바이어던'으로 국가를 간주한
토마스 홉즈의 국가관에서 이미 잘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가성의 희석' 문제가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이는 냉전 종식,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기치 하에 진행되고
있는 경제의 세계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교통 및 통신의 발전
등 시대적 조류와 깊은 관계가 있다.
국가성 약화의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기존 국가들 내에서
분리주의 운동의 강화, 지역 통합에 따른 주권의 이양과 통합,
복지국가의 해체, 개별 국가 거시 경제정책의 효과성 감소, 민영화를
통한 국가 경영의 감량화 추세, 환경 문제 등 지구적 수준의 쟁점
부상 및 그 해결을 위한 국제 협력의 필요성 증대, 지구적 문제의
해결 주체로서 국제기구ㆍNGOㆍ다국적 기업 등 국가 이외 행위자들의
등장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영국의 수잔 스트레인지나 빈센트 케이블 등 많은 학자들이
국가는 '쇠퇴'하고 있으며, 그 권위가 '위축'되고 있고, 기능상
'결함'을 노정하고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반면 미국의 피터 에반스 등 국가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함을
강조하며 이런 입장에 반대 견해를 밝히는 학자들도 물론 있다.
국가성의 희석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면화되고 있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근대국가 체제가 처음 형성된 유럽이다. 단일시장의 구축을 거쳐 이제
화폐 통합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으면서 외교ㆍ안보 및 내무ㆍ사법
분야에까지 통합의 박차를 가하고 있는 유럽연합이 바로 국가성 희석의
대표적 실례라고 하겠다.
또 유럽에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국가ㆍ자본ㆍ노동의
3자 협조를 근간으로 하는 조합주의 구도가 깨져 나가고 이에 기반한
복지국가가 와해되면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강력한 국가 주도하의
경제발전 모델을 성공시킨 이른바 '발전 국가'들이 외환 위기에
맥없이 무너지면서 국가의 관리 능력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근대의 산물인 국가는 탈근대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과거의
유물로 박제되고 말 것인가? 오늘날 국가성의 희석 현상은 기존의
국가가 더 이상 공공재의 제공에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으며, 가장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국가가 제 기능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할 때, 그리고 국가를 대신할 수 있는 공적 권위체가 존재할
때 시민들의 정체성(identity)과 충성심은 국가 아닌 다른 곳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갈 것이다.
기존의 국가가 기능과 위상을 재정립하여 새로운 내용의 국가성을
획득함으로써 다시 그 생명력을 과시할지, 아니면 국가를 대신하여
새로운 통치 형태를 구현하는 새로운 공적 권위체가 출현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다만 안보와 복지라는 두 가지의 가장 중요한
공공재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직 국가 밖에 없다는 점에서,
국가의 시대가 쉽게 막을 내릴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최진우/ 한양대교수ㆍ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