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건 미성숙에도 대통령 의지 앞세워 강행…
권력 무게 중심은 오히려 얕아져 ##
어린 아이들도 아는 상식이지만, 무게중심이 얕은 배는 조그마한
파도에도 흔들리기 쉽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정권의 무게중심이
얕을수록 안정된 국정운영을 할 수가 없고, 조그마한 충격에도 정부가
흔들리게 된다. 정부부처의 장관들과 공직자들 그리고 집권당이 정부와
권력 일체감을 갖고 국민적 관심이 높은 주요 정책 현안의 해결을 위해
그야말로 '몸바쳐 뛰고', 그 결과로서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높아질 때 권력의 무게중심은 깊어지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김대중 정부는 권력의 무게중심이 얕아지는
국면을 맞고 있다. 임기 중반을 넘기면서 김 대통령의 개혁정치가
그 방향성과 탄력을 잃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은 여전히
개혁의 완수를 강조하지만, 국민들은 정책 혼선에 시달리며 오히려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를 되묻고 있다. 집권당 내부에서조차
'민심이 떠나가고 있다'는 탄식이 나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외환위기의 그 어려운 국난을 힘겹게 극복해 온 김대중 정부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벌써 김 대통령의 '권력누수'가 시작되었기
때문인가? 어느 논객의 말처럼 과연 김 대통령의 국정운영 '통찰력과
현명함'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가? 아니면 소수당 정권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인가?
김대중 정부는 소수당 정권으로 출범했지만, 그것이 정권의
무게중심을 얕게 한 원인은 아니었다. 집권초기에 맞은 IMF 위기의
그 절박한 상황이 김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높여주었고,
공직사회와 집권당에 위기극복을 위해 개혁을 완수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김 대통령의 권력기반은
튼튼하였고, 대통령의 국정주도권도 확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정치가 지속될수록 그와 같은 김 대통령의 권력 자산은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정책결정 과정에서 소외
확실히 개혁은 기존의 질서와 관행를 깨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인 만큼 어쩔 수없이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이고,
더우기 개혁을 위한 대가는 '지금 당장' 지불해야 하나, 그 효과와
혜택은 단기간에 나타나지 않는 '고통과 효과의 시간적 불일치'
때문에 지속적으로 환영받기 어려운 정책이다. 그래서 '나라와
국민을 살리기 위한 개혁'이지만, 그것을 추진하면 할수록 집권세력의
정치적 지지기반은 오히려 약화되는 역설적인 딜레마를 지닌 것이
바로 개혁이다.
이런 점에서, 역시 개혁을 전면에 내걸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개혁의 대상으로 설정해야 했으므로
그 권력기반의 지속적인 침식을 피할 수 없었다. 반면에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에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과 개혁대상이 상당수준 구분되는 유리한 구도 속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 대통령은 개혁의 정치적 딜레마를 훨씬
덜 고민해도 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고민의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다시 한번 김영삼 정부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개혁은
'고통과 효과의 시간적 불일치' 현상을 지닌 것인 만큼, 그것이
아무리 급박해도 국민적 합의와 동참을 구하는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개혁'이 아니면 지속적인 국민적 지지를 확보할 수가 없다.
그것이 김영삼 정부가 실패한 한 원인이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는
국민의 동의와 참여를 구하기보다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의거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개혁은 추진하였으되 어느 누구도 개혁주체가
되지 못하고, 모두가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김 전 대통령은 타이밍 선택과 순발력에는 뛰어났으나, 정책추진의
집중력과 논리적 설득력에는 취약하였다. 그것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위에서만의 개혁'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김대중 대통령은 뛰어난 논리력과 집중력을 지니고 있다.
정책추진이든, 야당에 대한 공격이든 한번 마음먹으면 현란한 홍보와
함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남북정상회담은 그와 같은 김 대통령의
특장이 성취해 낸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치도 역시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그러한 결단이 정책현안을 둘러싼
갈등집단들간의 의견수렴 위에서, 또한 개혁추진의 준비여건에 대한
고려 위에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개혁철학'에서 당위적으로
연역되어 내려진다. 개혁이 '아래로부터의 의견수렴'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행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결심한 개혁정책에 대한 비판은 대통령과 정부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많은 비판과 여건 미비에도
불구하고 교육개혁, 국민연금제도 개혁, 의약분업 정책 등이
무리하게 강행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집권당에 정치적 자율권 부여해야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이 '준비된 대통령의 준비 안된 개혁'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개혁의
혼란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정부의 현란한 정책홍보는
오히려 '말만 앞세운다'는 비난을 불러 일으켜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김 대통령 권력의 무게중심이 얕아진 또 하나의 이유는 권력의
청와대 집중에 있다. 소수정권의 불안에서 출범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대중 대통령도 강력한 사정 개혁으로 집권 전반기를
이끌어 왔다. 부정부패 척결이 중대한 국민적 요구이며 개혁과제라는
차원에서 사정개혁은 당연한 선택이지만, 사정개혁은 또한 대통령의
권력강화라는 또 다른 정치적 부수효과를 지닌 무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들은 자신의 권력 정당성 제고와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사정정책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곤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도적' 사정개혁의 지속은 대통령에로의 권력집중을 심화시켜
권력운영의 동맥경화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공무원들은 복지부동하고,
정부부처의 수장인 장관들조차 대통령의 의중만 헤아리게 하여 권력의
탄력성을 잃게 된다. 사회의 모든 부분이 위축되어 창발력을 잃고,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실 이외에는 모두를 정책결정의 소외자로
만들게 된다.
대통령의 지시나 지침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자발성과 자율성을
잃은 공직사회와 집권당으로는 정책현안에 탄력성있게 대처할 수 없으며,
개혁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도 없다. 최근의 의약분업 개혁과
현대건설 사태에 대한 정부의 혼란된 대처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정책현안과 관련된 갈등집단들은 주무부처 장관은 물론 집권당
대표조차 제쳐두고 오직 대통령과의 담판만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이
모든 정책현안을 검토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정치로는 정부정책의 시의성과 합리성을 유지할 수도 없고,
정책수행을 통한 권력기반의 외연 확대를 기대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김대중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국정운영의
난맥상은 소수정권의 한계, 대통령의 '통찰력과 현명함'의 쇠퇴에서
그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제대로 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제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를 맞고 있다. 이른바
'레임 덕'을 우려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대통령에로의 권력집중에 대한 유혹은 그만큼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발생시켜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을 유실시키고, 권력의 무게중심을 더욱 더 얕게 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집권당에 보다 폭넓은 정치적 자율권을 부여하고,
차기 대통령 후보를 위한 경쟁을 점차적으로 개방하여 정치적 활력이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또한 정부부처의 자율성과 권위를 강화시켜
장관이 정책의 전면에 나서게 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 권력기반이
보다 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고, 합리적 개혁정책의 완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은 대통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집권당과
정부부처의 권위와 자율성을 제고시키는 것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정영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ㆍ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