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난 타개ㆍ체제유지 위한 고육책…
변화 계속되어도 전면개방은 어려울 듯 ##


지난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불과 두달 남짓 지난 시점에서
남북관계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으며, 그 한 가운데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있다. 앞으로 변화의 방향과 속도는
김 위원장의 행동과 말 한마디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2박 3일간의 정상회담, 3시간반 동안의 남한 언론사 사장단과의
오찬 등에서 김 위원장이 내뱉은 말은 파격적이었다. 통일문제에서
사회문화교류와 경협, 미사일 문제 등 대외관계까지 전향적인 발언을
했다. 김용순 노동당 비서 겸 아태평화위원장 등 주변 측근 인물들의
걱정스런 표정은 아랑곳 하지 않았으며, 감히 누구도 그의 발언을
제지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는 후문이다.

경의선 복원공사와 관련, 김 위원장은 "분계선(휴전선)을 지키는
2개 사단 3만5000명을 빼내 착공하겠다"고 했다. 군사분계선 상공을
지나는 서울~평양 직항로에 대해 군부가 "항공기에서 특수카메라로
사진 찍는다고 반대하지만, 기름도 안나는 나라에서 뭐하려고
서해상으로 나가 돌아서 오가느냐"며 직항로 운항을 약속했다.
100만이 넘는 인민군 통수권자의 발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의 힘은 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진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원래 매사에 시원시원하고 통 큰 사람인가. 아니면 뭔가
노리고 계획된 각본에 따라 발언을 하는 것일까. 계산된 발언이라면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은둔의 지도자'로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을까. 정말 그는
남한과의 교류·협력을 확대할 것인가. 그의 이러한 몸짓은 개방으로
가려는 출발신호인가.…

●“통일은 50년쯤 뒤에나”

이와 관련, 김 위원장이 북한체제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분석이
거의 지배적이다. 남조선 적화통일 전략에 따른 적대관계에서 남과
북이 함께 살아가자는 공존전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김 대통령이 통일의 시기를 20~30년 후라고 하자,
김 위원장은 "50년쯤 뒤"라고 두 배로 늦췄다. 또 "통일은 내
막을 탓"이라고 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의지와 함께 지금은 안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김 위원장은 왜 공존전략을 택했을까.

통일부 당국자들은 "오랜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남한과의
협력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도 "김 위원장은 생존을 위해 기존의 적대관계를
공존관계로 바꾸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제성호
중앙대 교수는 "경제난으로 체제유지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으로선 다른 길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고육책"이라고 풀이했다.

식량난 해소와 스러져 가는 산업시설을 재건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데, 지난 몇년 동안 남한을 우회해 미국 일본 유럽 등을
두들겨 보았으나 신통치 않았고 모두 "남한한테 이야기 해보라"하는
분위기였다. 늘 남쪽이 교류협력을 내세워 북한 체제를 흡수통일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남쪽에 손을 내미는 게 어려웠는데 지난
2년 동안 김 대통령이 흡수통일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일단 믿어보자며 나섰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북한 주민들은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이기도
하겠지만 한·미의 공격을 두려워 하는 분위기"라고 말하고 있다.
남조선과 미제 때문에 우리가 굶고 있다는 교육으로 적개심도 있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는 일단 북에게
덜 위협적이라는 확신을 지난 2년간의 교류협력을 통해 어느 정도
갖게 됐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 위원장의 변화된 모습은 또 남한과 서방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퍼져나가 결과적으로 그간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는데도 적지않은
도움이 될 것이란 지적이다. 남한 언론사 사장단에게 "언론이 잘
써줘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봐서도 이미지 개선은 의도된 듯하다.
김 위원장의 변화는 대남·대외관계 분야 종사자들의 어깨를 가볍게
할 것이다. 그간 개방의 발목을 잡아왔던 군부를 김 위원장이 적절히
눌러 놓을 경우, 개방은 상당한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한의 변화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김 위원장의 발언에
배어있는 자신감 등으로 미뤄, 변화는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최소한 김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진
이같은 관계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변화는 서로 체제
내부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다. 김 위원장
스스로도 서로의 체제 내부문제는 건드리지 않자는 입장이다.
"국가보안법 개정은 전적으로 남조선 내부문제"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인 예.

그러나 지금의 변화가 남북한 주민들의 자유왕래와 전면개방으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변화의 충격을 통제하고
견디기 어려울 경우, 과거로 회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없다"고
말한다. 김 위원장 스스로도 한라산·백두산 교차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은 언급했지만 남북한간 대규모 인적 교류에 대해선 일절
언급이 없다.

경협도 경제논리가 아니라 의리를 중시하는 쪽이다. 그는 "현대는
맨 먼저 우리와 거래를 했고, 소를 갖고 왔는데 성의를 무시할 수
없지 않느냐"며 현대에 특혜를 줬다고까지 했다. 이는 앞으로도
'선물'을 주는 기업과의 경협을 우선시하겠다는 의미로 들리며,
자연 경협의 폭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대해 자주성, 자존심 등을 자주 거론,
교조적 관점을 드러낸 것도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미국과는
'테러국 리스트'에서 해제되면 곧바로 수교하겠다고 밝혔지만,
일본과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을 자존심과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는 시드니올림픽에 남북 정상이 공동 초청받은 것과 관련,
"시드니에 가서 배우노릇하는 것보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김 위원장의 이같은 변신은 남한내 연북·친북 분위기를 조성하고
반북 세력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세의 측면이 깔려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남쪽과의 교류의 문을 거의 열지 않고 체제를 유지하는
소극적 자세에서 남한 내에 '내 편'을 보다 만들어 체제위협적
요소를 무력화시키는 적극적 자세로 변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철저하게 남한 내부에 혼란을 일으켜, 그 반사이익으로 체제를
안정시켜 보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송영대 전 통일원 차관은 "김 위원장의 발언은 남한 내 북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빼내려는 고도의 전략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등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교류협력만 강조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자주적
통일과 연방제에 의한 통일의 길을 열어놓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연방제는 그동안 남쪽에서 가장 수용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낮은 단계든 뭐든 어쨌든 남북 합의문에 명시했다는
것은 북한으로선 큰 성과랄 수 있다.

●남한 내 반북세력 무력화 의도

언론 길들이기가 여전한 것도 마찬가지. 북한은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서울에서의 이산가족 상봉과정에서 남한의 4개 TV방송
내용을 철저하게 모니터했다. 탈북자들을 출연시킨 MBC로부터는
"보도 시기가 적절치 못했고 피차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해야
하는 점을 인정한다", "북측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내용의 '해명서'까지 받아냈다. 북측이 우리측에 "사과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 "일정 협의도 못하겠다"는 등으로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이 의도한 바대로 진행되기
어려운 측면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김 위원장의 의도가 변화된
모습으로 외부 지원을 보다 많이 얻어내려는 것일 경우, 변화속도를
스스로 제어한다는 게 그리 쉽지 않다. 문은 열기 시작하면, 점점
더 확대되고 나중엔 닫기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다. 단계적 개방도
그런 점을 감안한 것이겠으나 그 또한 간단하지 않다. 변화의
충격은 감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법이다. 또
그 충격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중심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김 위원장도 김 대통령 임기중
연합단계를 성사시켜 체제안정을 꾀하려 할 가능성도 있다.

남한 내부의 반북 세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어도
뜻대로만 되진 않을 것이다. 남한 내 보수세력이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예상치 못한 큰 반발도 있을 수 있다. 이는 대북정책과 관련해
김 대통령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