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자층은 진보ㆍ보수로 폭넓어지고 비판ㆍ문제의식 첨예화 ##


학풍이 바뀌고 있다. 학문은 시대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시대 변화가 또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모두에 선 우리 학문의 경향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대학은
안바뀌는데 대학교수들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대학들은 학부제다, BK21이다 해서 진통을 겪고 있다. 진통이라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실은 대학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보면 최근 10년간 학계에 자리잡은 30ㆍ40대
교수들의 질은 급속히 높아졌다. 질 낮은 대학과 질 좋은 교수,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런 현상이 우리 대학의 현주소다.

비교적 장년에 속하는 경희대 영문과 도정일 교수는 "학부제의
폐해가 심각하다. 학부 수준에서 자신이 전공할 분야에 대한
기본 소양을 쌓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철학ㆍ역사 등 기초학문의
외면은 이미 일상화됐다"고 말했다. BK21에 대한 교수들의 부정적
인식은 재론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철학ㆍ역사 등 기초학문 외면 일상화

그런데 교수들의 학문 수준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다. 일부 학문을
제외하면 급속도로 국제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한물 간 외국의
유명 학자 두 세 명을 초청해 개론적 내용이나 확인하던 국내에서의
국제회의는 거의 사라졌다. 국제학술회의 행사에서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며 외국학자들과 활발한 토론을 벌이는 일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전문성을 인정받아 외국학계의 초청으로 강연 및 강의를 떠나는
교수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 이남인(42) 교수는
현상학 분야에서 '본능의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미국과 유럽 대학에서 기념강연을 했다. 당연히 일반강의와
기념강연은 다르다. 기호학 전공의 고려대 언어학과 김성도 교수도
세계적 기호학자인 '장미의 이름'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 등이
주도하는 세계기호학대회 때마다 초청을 받아 외국 학자들과 활발한
토론을 벌인다. 김달중 세종연구소장이 지난 8월 2일
세계정치학회장으로 선출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해외 대학들과의 공동 프로젝트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것이 고려대
평화연구소와 하버드 아시아센터의 '박정희 연구' 프로젝트다.
지난 61년부터 79년까지 박정희시대에 대한 이 연구 프로젝트에서
하버드대 에즈라 보겔 교수와 고려대 정외과 김병국 교수가 공동
편집위원을 맡았다. 서울대 송호근(노동), 중앙대 장훈(공화당),
이화여대 김수진(신민당), 서울대 신욱희(67년ㆍ72년 한미동맹체제),
고려대 임혁백(유신의 기원), 위스콘신대 허치 크라프트(한국과
동남아 비교연구), 하버드대 카터 에카트(박정희)와
도밍게스(박정희시대의 한국과 라틴아메리카), 호주국립대
노블(한국ㆍ대만ㆍ일본 비교연구) 교수 등 한국학자 38명과
외국학자4명이 함께 이 연구를 이끌고 있다. 성과물은 2001년
상반기말쯤 나올 예정이다. 이들은 박정희시대가 끝나면 2공화국을
비롯한 우리 현대사의 다른 시대도 계속 국제적 시각에서 조명해
가기로 했다.

학문적 수준 못지않게 비판의식 내지 문제의식 또한 첨예한 것이
이들 소장학자들이 갖고 있는 주요한 덕목이다. 한양대 사학과
임지현교수는 "유신시대와 군사정부 시절을 겪으면서 내면화된
비판정신 때문"으로 분석했다.

진보 성향의 학자들이 다수 학계에 자리잡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80년대에는 마르크스경제학을 전공한 김수행교수가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것 자체가 학계에서는 큰 뉴스였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좌파 성향임을 내세우는 교수의 상당수가 학계에서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신대 윤소영(경제학)ㆍ이해영(국제관계), 가톨릭대
이삼성(정치학), 한양대 임지현(서양사), 동국대 홍윤기(철학)ㆍ
황태연(정치사상) 교수 등이 그런 경우다. 이런 교수들은 이제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이에 맞서 스스로 보수 성향 내지 우파임을 내세우는 교수들도
늘고 있다.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 경향의 학자들이다. 묘하게도
연세대 사회과학 분야에 이런 성향의 교수들이 많다. 함재봉ㆍ
장동진(정치학), 유석춘(사회학) 교수 등이 그런 경우이며 서강대
강정인, 숭실대 서병훈, 한국교원대 김주성 교수 등이 이런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학문 스타일도 현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입지점이 진보 성향의 학자들과 다를 뿐이다. 서강대
강정인 교수는 "자유민주주의의 고전적 원리에 비춰 보더라도 아직
우리 사회는 고쳐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좌에서 우까지 다양한 학자들이 포진되면서 학술 계간지의
지평도 넓어졌다는 평가다. '진보평론', '당대', '창작과비평'
등이 좌파를 대변한다면 '문학과지성', '비평', '사회비평'
등은 중도의 계간지이며 '전통과 현대'는 보수 쪽에 속한다.

이념의 문제와는 별개로 문제의식을 가진 동양학자 내지 한문학자의
증가도 최근 학계의 새로운 변화 양상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동양철학, 한문학 등은 고전에 대한 개론적
주해와 선인들에 대한 맹목적 찬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양대
국문과 정민교수의 경우 지극히 현대적인 문체로 역사 속의 문헌들을
되살려내 주목받는 경우이고,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교수는 우리
고전의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정민 교수는 "더 이상 한학이
고리타분의 대명사일 수 없다. 선인들이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는
밀도의 절반만 우리가 가져도 훨씬 현실감 있는 문제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우리의 소중한 고전들이 연이어
번역되는 현실은 이들의 역할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5월 중국어문학회(회장 이종진) 주최로 열린
학술대회 '동양학, 고증인가 방법인가'는 주목할 만하다. 이날
대회는 학술행사라기보다는 고답적 고증주의를 고집해온 기성학자들을
향한 30ㆍ40대 소장학자들의 선전포고의 장소였다.

50대의 서울대 송영배(동양철학) 교수가 "철저한 해석학적
이해(고증)에 바탕을 두면서 시대의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동양학을 해야 한다"는 기조발표를 했다.

곧이어 고려대 심경호(한문학) 교수는 "기존의 고증주의는 텍스트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며 "그같은 텍스트에
대한 중성적인 독해는 관념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서강대 김근(중국문화학) 교수는 '한국의 중국학'의 문제점을
학문권력의 문제로 분석했다. 김 교수는 "기성학자들은 고증학,
실증주의, 기원주의라는 3가지 장치를 통해 자신들의 학문 권력을
유지해왔다"며 "게다가 서로의 영역을 그어놓고 상호 침범 금지를
묵계함으로써 비판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했다"고 비판했다. 대안으로
그는 현재 소장학자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 글쓰기 쇄신운동을 꼽았다.
폐쇄적이고 형식적인 논문식 글쓰기에서 벗어나 저자의 고유한 생각과
현실 진단을 글 속에 자유롭게 담아내자는 것이다.

이 대회를 기획했던 이화여대 정재서(중국문학) 교수는 "앞으로
우리들이 추구하는 과감한 시각들이 담긴 논문들만을 중심으로 한
학술대회를 연속해서 개최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거시적 이론에 대한 관심을 벗어던지고 미시적 사실 탐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새로운 흐름이다. 학계에서는 사회주의 붕괴와 더불어
거시적 진단과 대안 체계가 효용성을 상실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한양대 임지현 교수를 비롯한 서양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족한
문화사학회의 경우 이런 흐름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서강대 사학과
백승종 교수의 학문 역시 미시사라는 분야의 표본이다. 백 교수의
경우 57년을 전후해서 북한을 방문해 전후 복구를 도왔던 동독인
건설기술자의 사진자료 800여점을 최근 발굴해 당시의 생생했던
상황을 복원하는 저서를 낸 바 있다. 미시사의 경우 프랑스에서
성립한 아날학파에 대응하는 독일 내 역사학계의 한 조류로 점차
이 분야 전공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미시사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분야는 사회사와 문화사라는 점에서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한쪽에
밀려나 있는 새로운 장르가 개척될 여지가 크다.

●강단 집착 않고 활발한 저술활동

최근 몇년 사이 학계에 진입한 소장교수 그룹의 또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활발한 저술활동이다. 여기 저기 발표했던
논문이나 잡글을 모아 책을 내던 과거 교수들의 폐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학자 예비군'이라 할 수 있는 박사학위 소지
시간강사들도 강단 진출에만 집착하지 않고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연구의 한 획을 그은 박명림(정치학),
사회학적 시각에서 다산 정약용의 학문세계를 분석한 저서를
펴내 학계의 호평을 받은 정일균, 최근 한국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각각 탐구한 문고본 2권을 펴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탁석산(철학),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책을 낸
김기봉(서양사), 서양철학사를 현지 중심으로 답사한 이동희
박사 등이 그런 경우다.

분야별로도 신진학자들의 등장은 눈부시다. 문화사, 미시사,
기술사회학, 환경정치학 등은 과거에는 생각도 못했던 분야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전문가들의 등장으로 불과 2~3년만에 확고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김환석 교수는 "기술사회학 연구자들이 이미
30여명에 이른다"며 "조만간 실천 분야에서도 큰 성과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양질의 필자군 등장이라는 점에서 인문ㆍ사회과학 출판사들의
기획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푸른숲 김학원 편집주간은
"불과 3~4년 전만에도 필자 난이라는 소리들을 했는데 최근 갑자기
필자들이 풍부해졌다"며 "요즘은 오히려 출판사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원하는 책들을 다 못내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런 학자들을 최대한 담아내 후진 양성에 힘쓸
수 있도록 대학을 개편해가는 게 대학개혁의 방향이다. 지금의
대학과 교육당국의 대학정책은 전혀 다른 쪽을 쳐다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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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훈 숭실대 정외과 교수
"한국적 현실에서 자유주의의 착근 가능성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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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현대적 시각에서 분석한 95년의 두번째
저서 '자유의 본질과 유토피아'를 냄으로써 숭실대 정외과
서병훈(43) 교수는 자유주의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자유주의자라는
명칭이 새삼스러운 것은 그 이전까지 소장학자들은 대충 좌파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자유주의의 착근 가능성을 모색하는 게 지금 내
학문의 방향입니다."

서 교수는 최근 '자유의 미학'을 나남출판사에서 펴냈다. 부제는
플라톤과 밀. 칼 포퍼에 의해 열린 사회의 적으로 낙인찍힌 플라톤을
밀과 대비시킨 것이 예사롭지 않다. 이미 그는 지난 95년 작업에서
밀을 자유만능주의로 봐 온 기존의 시각을 비판한 바 있었다. "밀은
자유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고 자기발전이라는 가치를 함께
중시했습니다."

이런 인식의 결과 그는 자연스레 아테네 민주정치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을 가했던 철학자 플라톤에 눈길이 갔다. 민주과잉의 느낌을 주는
최근 우리 현실도 그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모색케 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달성되면서 오히려 우리 사회는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뿌리랄까 근본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하지 않은 때문이겠지요."

사실 이런 스타일의 사고가 이제 우리 학계에서도 드문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그룹이 계간 '전통과 현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학자군이다. 서울대 유홍림(정치학과), 연세대 함재봉(정외과)ㆍ
유석춘(사회학과), 고려대 김병국(정외과) 교수 등이 그렇다. 특히
유홍림ㆍ함재봉 교수는 바로 그 가치를 서양사상이 아니라 동양사상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양에서도 현대의 자유주의는 불가지론과 소극적 자유론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냥 자유만을 강조할 뿐 왜 하필 자유여야
하는가에 관한 입론이 약한 것이지요. 플라톤과 밀은 다릅니다.
플라톤의 '좋은 삶'과 밀의 '생명의 원리'같은 가치가 자유를
지키고 키우는 것이지요."

이렇게 계속 진행된다면 아마 그의 네번째 책은 한국적 가치에 관한
탐구가 되리라 미리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