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다카하시 데츠야 지음
이규수 옮김, 역사비평사
다시 8월이다. 근현대 한일관계사를 전공하고 있는 필자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 그리고 전후처리와 역사
인식에 관련해 어떤 책들이 새로 출간되었는가를 조사해보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이번에 나의 시선을 끈 책은 이 글에서 소개하는
다카하시 데츠야의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 기억의 정치,
망각의 윤리」(원저:「전후책임론」, 1999, 강담사)였다.
필자는 지난 겨울 일본에 있을 때 이 책을 처음 읽고 오늘날 일본에서
뜨겁게 벌어지고 있는 역사논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적합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8.15를 앞두고, 이 책이
일본의 역사학계에 정통한 젊은 학자에 의해 번역되어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다는 것은 매우 시의 적합한 일이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일본에서는 청일전쟁 이래
일본이 전개한 수 차례의 전쟁과 아시아 각 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지른 갖가지 사건과 범죄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교과서에 기술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불을 뿜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군의 남경 대학살, 위안부 강제 동원,
피지배민에 대한 생체실험 등의 진위 여부와 책임 소재 등에 관해
역사연구자, 역사교육자, 문예비평가 사이에 부정과 긍정의 공방이
치열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여ㆍ야 정치권과 매스커뮤니케이션은
물론이고 시민운동과 일반국민에까지 광범하게 번져, 일본의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마치 극단으로 양분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조차
한다.
이것은 1985년을 전후하여 독일에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그 책임의
부담 여부를 둘러싸고 불을 뿜었던 역사가 논쟁 내지 역사 주체 논쟁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40,5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국가들의 사상계가 전쟁의 망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고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역설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다카하시 데츠야는 이 책에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또 그에 대한 책임을 응당하게 짊어져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논지를 좀더 분명히 밝히기 위해 자신과 반대되는
처지에 서 있는 사람들, 즉 일본의 침략 전쟁을 부정하고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소위 '자유주의 사관' 논자들의 역사인식과 주의ㆍ주장에
대해 본질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제1부 '전후 책임을 묻는다'에서는 전후에 태어난 한 일본인으로서
(그는 1956년 생이다), 아시아의 전쟁 피해자가 제기하는 호소에
진정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뜻을, '쇼아'와 '햄릿' 등의 영상 자료와
문학작품을 적절하게 원용하면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제2부
'네오내셔널리즘 비판'에서는 최근 일본에서 고조되고 있는 신민족주의의
허구성을, 군대위안부에 대한 독일과 일본의 논란 등을 대비하면서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제3부 '우리들과 타자'에서는 일본
국민이 피침략국의 피해자에게 사죄와 보상을 하는 법적ㆍ정치적 의미를
논하면서, 히노마루ㆍ기미가요의 법제화로 대표되는 상징천황제가 국민적
합의를 배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철저하게 경험한 바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는 역사 논쟁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역사논쟁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그치지 않고, 실은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이냐에 관련된 미래를 함께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학ㆍ철학ㆍ문학ㆍ심리학 등의 기법과 한국ㆍ독일ㆍ프랑스ㆍ
이스라엘 등의 역사논쟁을 종횡으로 구사하며 격조 높은 수사로 쓰여진
이 책은 한국의 역사학자ㆍ역사교육자ㆍ문예비평가들에게 '내일을
여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자극제가 될
것으로 믿는다. (정재정ㆍ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