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기와 노련의 대 충돌. 정점은 지났으나 농익은 원숙미로 일가를
완성중인 조훈현(47)과, 절정을 향해 한창 뻗어가고 있는 청년 기사
창하오(상호ㆍ24)가 각각 마주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12일
도쿄 9단회관서 벌어질 제13회 후지쓰배 결승전. 리허설도, 반격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러시안 룰렛 식 단판 승부다.

이번 대결엔 크게 보아 3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둘의 이번
싸움 결과에 따라 세계 바둑 지도가 새로 그려지게 된다. 지난 봄에
끝난 제4회 LG배는 예상을 뒤엎고 중국의 위빈(유빈)의 품에 안겼다.
만약 이번에 창하오가 후지쓰배 마저 챙겨간다면 중국은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세계 바둑계에 군림케 된다. 지난 해까지 7개 대회 연속
제패를 자랑해 온 한국은 졸지에 2류국으로 전락할 판이다.

두번째는 세대 간의 대결. 20대의 대학생 아들을 두고 있는
조훈현으로선 아들 뻘과의 싸움이다. 체면으로만 볼 때는 조훈현 쪽이
더 부담스러울 것 같지만, 창하오로서도 자기 나이의 두배나 되는
퇴물(?)에 결코 질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국제대회 최고령 우승 기록은 50세 3개월. 일본의 오다케(58) 구단이
92년 8월 제5회 후지쓰배를 차지할 때 수립했다. 53년 3월 생인 조훈현이
이번 결승서 승리할 경우 47세 5개월만의 세계 제패로, 오다케의 기록에
버금가는 금자탑이 된다. 정 반대로 창하오가 이길 경우도 기록적이다.
23세 9개월만의 우승은 이창호란 특수 케이스(?)만 빼면 최연소 기록에
해당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역시 개인적인 자존심이다. 국가 대결이니,
세대 대결이니 하는 것은 부차적 요소일 수밖에 없기 때문. 생애 통산
세계 메이저 대회 우승 5회로 이창호에 이어 2위인 조훈현으로선 혹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우승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다. 창하오 역시
2년 전 후지쓰배 대회때 단 한번 국제 무대 결승에 올랐다가 이창호에
패배, 준우승한게 고작이어서 절박하긴 마찬가지. 문제는 두 기사의
최근 컨디션인데, 이 대목에서 둘은 동병상련이다.

조훈현의 요즘 행보는 확실히 예전같지 않다. 올해 승률은 5할이 약간
웃돌 뿐이며, 특히 7월 이후 최근까지는 2승 6패란 최악의 부진이다.
춘란배, 잉씨배 등서 탈락했고 국내서도 국수위를 내 주는 등「작황」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곧 무너질 듯 하다가도 결정적
고비에선 딴 사람처럼 회생한다는 점. 그 와중에도 미니 국제전인
TV아시아대회서 우승하더니 후지쓰배 결승까지 왔다. 역대 여섯 차례
국제대회 결승 진출에 5회를 우승한 「큰 승부 체질」이 이번 결승서도
발휘될지가 주목 꺼리.

창하오는 한달 여 전 발표된 중국 랭킹서 3위로 내려갔. 97년 2월부터
98년 말까지 3년 가까이 정상을 지켰던 그로선 안타까운 역행이다. 지난
연말 마샤오춘(마효춘)에게 1위를 되 빼앗긴데 이어 최근 저우허양(주학양)에게
마저 앞지름 당한 것. 4회 LG배와 2회 춘란배서 8강, 4회 잉씨배선 4강에
그쳤다. 하지만 최명훈 유창혁 고바야시를 연파하고 올라온 기세는 예사롭지
않다.

두 기사는 그간 총 여섯 판을 겨뤄 3승 3패를 마크, 이번 결승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다. 다만 조훈현의 막판 2연패가 마음에 걸린다. 후지쓰배만
놓고보면 한국은 대회 3연패및 통산 6회 우승을, 중국은 95년 8회 대회를
제패한 마샤오춘 이래 두번째 패권을 노리고 있다.『아직은 물러설 때가
아니라』는 듯 버티고 선 20세기의 거인. 『이제는 당신들에게 더 이상
배울게 없다』는 듯 공세를 강화하는 21세기의 첨병. 마주 선 두 열차는
마침내 출발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홍렬 기자)

◇양자간 역대 대결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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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대회 승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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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8 2회 롯데배 조훈현 백 5집반
97.8 2회 삼성배 창하오 백 9집반
97.8 4회 롯데배 조훈현 흑 3집반
99.5 1회 춘란배 조훈현 흑 불계
99.9 4회 삼성배 창하오 백 1집반
00.3 1회 농심배 창하오 백 3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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