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들과 같은 기준의 잣대에서 공정하게 평가받을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입니다. 작가란 나이가 아니라 작품으로
말하는 거니까요. 한참 왕성하게 필력을 과시할 그들과 작품으로
대결할 수 있다는 건 오히려 영광이죠."

작가 박범신(54)을 만난 것은 그의 문학전집이 나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지금도 꾸준히 단편을 쓰고 있는 데다, 이순(60세)도
한참 남은 나이에 나오는 전집을 작가는 몹시도 겸연쩍어 했다.
하지만, 남진우 이경호 이순원 등 전집 기획위원들은 "박범신의
장편은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속류 자본주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세태소설"이라며 "문학적 평가의 핵심대상으로
장편소설이 떠오르고 있는 시대에 그의 문학을 되새겨 보는 일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73년 '여름의 잔해'로 등단한 이후, 작가는 도회적 세련미와
감각적 문체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양산해 왔다. 그의 말마따나
"불같은 질주의 관성으로 소설을 써 왔던 시기"였다. 하지만
91년, 돌연 삶과 문학에 대한 원형적 의문에 사로잡히면서 "과연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97년에 나온 창작집
'흰 소가 끄는 수레'와 99년에 나온 장편 '침묵의 집'은 그
원형적 의문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인 셈이다.

"문예지에 보낼 단편 한 편 쓰면서 하는 고민들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이전 베스트셀러 작가 때와는 또 다르게 누리는
즐거움이랄까."

그는 "변방에서 기웃거리다가 점점 문학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느낌"이라며 "문학청년으로 늙고 싶고, 문학청년으로 죽고 싶을
정도"라고도 했다.

명지대 문예창작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요즘 경기도
용인에 오두막을 하나 지어놓고 자주 내려간단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며 작품도 쓰고 농사도 짓는다는 얘기다. 텃밭에는
참외가 아주 잘 익었다며 내려와 함께 먹자고 권한다.

"참외를 따 먹기가 송구스러워요. 내가 한 일이라고는 씨를
뿌린 것 밖에 없는데, 그것이 햇빛과 물만으로 이렇게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

인터넷 홈페이지를 최근 만들었더니 30~40대 중년 독자들이 자주
찾아온단다. 그들이 젊었던 시절 읽었던 박범신 소설의 소회를
구구절절 올리고, 이메일도 보내온다고 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들, 독자들의 추억과 인생에 작가는 진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수십 수백만 독자를 가진 베스트셀러 작가의 감동과 각성은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세상에 '던져'놓은 작품들이
십수 년 후, 훌쩍 커버린 독자들과 함께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
마치 씨를 뿌린 뒤, 별 손을 보지도 못했는데도 탐스러운 열매로
돌아온 그의 텃밭 참외처럼.

스무 권 분량으로 나오게 될 전집에서 78년 나왔던 첫 창작집
'토끼와 잠수함', 그리고 79년 당시로서 20만부의 경이적인
판매실적을 올렸던 첫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전 2권)등 세
권이 먼저 나왔다. 두터운 표지 안쪽에 실린, 세련된 외모와
형형한 눈빛의 70년대 작가 사진도 인상적이었지만, 기름기 없는
머리를 뒤로 넘기고 바짓가랑이 걷어붙이고 앉은 지금의 모습이
왠지 훨씬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