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피로연'(93년)과 '음식남녀'(94년)로 2년 내리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 '센스 센서빌리티'(95년)로 베를린영화제 대상,
'아이스 스톰'(97년)으로 칸영화제 대상 후보…. 대만출신
이안(리안·46) 감독의 필르모그러피는 경이롭다. 뉴욕대 유학파임을
감안해도, 할리우드서 만든 영어영화들까지 최상급 찬사를 모은 건
대단하달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르 섭렵이 변화무쌍 지경이다. 퀴어영화(결혼 피로연)에
코스튬드라마(센스 센서빌리티)가 있고 음식영화도 있다. 참담한
가족드라마로 관객을 질식시키고(아이스 스톰) 전쟁속 인간존재를
묻더니(라이드 위드 데블ㆍ99년) 정통 무협영화(와호장룡·2000년)를
들고 서울에 왔다. 주윤발 양자경을 앞세워 중국어 대사를 하는 지극히
동양적인 할리우드 영화다.
―급기야 무협영화까지 만들었다.
"어릴 적 쿵후영화를 보면서 환상과 관심을 키웠다. 작은 영화들을
해오다 웬만큼 자금을 동원할 처지가 되자 모험 삼아 결행했다. 영화적
언어로서 무술은 훌륭한 이야기 전개 도구다."
―철학적 명상적 분위기가 돋보인다.
"홍콩영화들은 쿵후의 진정한 의미를 잊은 채 무술쪽에만 집중했다.
쿵후는 차 끓이는 것, 영화 제작하는 것까지 뭔가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액션들이 우아하다. 무술감독 원화평과 논의하면서 어떤 원칙이 있었나.
"과거 무술영화는 줄거리 감독 따로 무술감독 따로였다. 별도의 두
영화가 한 작품에 들어있는 꼴이다. 그래서 이야기와 액션 모두에 일관된
분위기와 컨셉을 유지하려 애썼다. 격투신마다 의미는 물론, 등장인물
성격, 감정 갈등을 부여했다."
―휘청이는 대나무를 곡예하듯 타면서 남녀 주인공이 벌이는 격투가 특히
인상적이다.
"중국 남부의 푸른 대숲과 하얀 안개는 신비하고 유혹적이어서 진작부터
찍어보고 싶었다. 대나무는 고고하고 유연하면서도 뭔가를 찌르는 검의
이미지와 닮았다. 이 영화에선 이룰 수 없는 사랑도 암시한다. 연기자들을
와이어로 매달아 공중 동작을 찍은 뒤, 대숲을 컴퓨터로 합성했다."
―다음 작품 '베를린 다이어리'는 스릴러라니 장르 순례가 끝없다.
영화적 지향점은 무엇인가.
"여러 소재를 다루면서도, 억압조건을 벗어나려 애쓰는 사람들 모습을
일관되게 그려왔다. '센스 센서빌리티'에서 가장 극명하듯, 인간
자유의지와 사회적 책무 사이 패러독스나 갈등이 관심사다. '와호장룡'
역시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센스 센서빌리티'는 어떤 영국 영화보다 우아하고, '아이스 스톰'은
어떤 미국 가족드라마보다 신랄하다. 대만서 나고 자란 동양인으로 어떻게
서양 정서를 꿰뚫을 수 있는지 놀랍다.
"오감을 기울여 치밀하게 연구 조사했고, 많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작업한
결과다. 정작 어려웠던 건 미국사회의 연극적 전통이다. 가령 남북전쟁이라
하면 관습적인 묘사의 틀이 이미 존재한다. 그래서 적확하게 사실을 표현한다
해도 거부반응이 있을 수 있다. 내가 파악한 사실과 연극적 전통 사이
균형을 맞추는 게 힘들었다."
―스스로 최고작을 꼽는다면.
"내 자식들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을까만 '와호장룡'에 가장 큰 자부심을
갖는다. 제작 자체가 힘들었고 공들여 찍었다. 영어영화 만들며 쌓인
기대와 스트레스를 떠나 홀가분했다. 할리우드에서 일한다고 문화적 뿌리로
돌아가 작업하는 걸 잊어선 안된다. 그랬다간 몇년새 잊히고 만다."
―오우삼과 웨인 왕에 대한 촌평.
"둘 다 매우 좋아하고 존경한다. 다만 오우삼 최근작은 곳곳에 스토리
전개가 약하고 배우가 영화를 점령한 것 같아 조금 실망했다."
그는 정갈하고 고요한 특유의 영상처럼 질문마다 차분하고 성의있게 답했다.
그 영상에 내재한 힘처럼 말마다 생각의 깊이가 배있다. 초읽기 같은 인터뷰
끝에 "시간이 많다면 찻집에서 종일 얘기하면 좋을텐데"라고 인사치레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