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시네마 키드들이 기존 영화 시장에 속속 도전해오고 있다.
다른 영화에서 쓰다 남은 필름과 피까지 동원한 저예산 영화
'죽거나 나쁘거나'의 유승욱 감독에 이어, 18일 부천 환타스틱
영화제에서는 또하나의 초 저 예산 영화가 출현, 박수 갈채와
주목을 동시에 받았다.
16㎜로 찍은 64분짜리 영화 '너무 많이 본 사나이'와 이 영화
속편 격인 '감독 허치국' 두편을 잇달아 상영한 이날 부천 시청
대강당은 120분 내내 폭소가 터져나왔고 2부 종영은 박수로
마감됐다. 벌써 일반 극장 상영까지 거론되고 있는 이 영화 감독은
28세 손재곤씨. 한국외대를 나와 네오 영화 아카데미와
한겨레영화학교에서 뒤늦게 영화를 배운 그의 영화 경력은 1분짜리
16㎜와 5분짜리 비디오 2편이 전부다.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보려고 밥값 아껴
만든 건데, 황당하기도 하고...” 영화 제목에서 벌써 눈치 챌
수 있듯, 손재곤의 영화는 히치콕에 대한 선망과 존경이 담긴
영화광 이야기다. 창 너머로 이웃집을 염탐하는 ‘이창’
모티브로 시작, 브라이언 드 팔마의 ‘드레스 투 킬’을 넘어
‘현기증’으로 발전한다. 제목 ‘너무 많이 본 사나이’는
히치콕의 ‘너무 많이 안 사나이’의 패러디, 2편 제목
‘허치국’은 히치콕을 재치있게 한국식으로 구부린 이름이다.
영화로 날이 지고 새는 시네마 키드 손재곤의 첫 장편은
가난과 재치, 삼행시식의 농담으로 가득하다. 영화의 마술적
흡인력에 빠져들어가는 주인공은 곧 요즘 영상 세대들의
자화상이다. 밥값을 아껴 영화를 만드는 감독 자신이 곧 영화
주인공이며 관객이다. 영화학교 동기생 모임인 M16의 전폭
지원으로 태어난 '너무 많이…'는 35만원이란 믿을 수 없는
초 저예산으로 탄생했다. "당연히 '도그마' 제작방식을
택했지요. 마침 친구가 구입한 디지틀 비디오 레코더(소니VX1000)가
있어서 조명, 음향 기재 없이 가기로 했습니다. 스탭은 저와
조감독, 촬영 감독 딱 셋이었습니다." 경비 때문에 촬영은
딱 일곱번으로 제한됐다. 몫돈이 든 건 녹화 테이프값. 8만원
들었다. 편집기 빌리는데 5만원, 모두 친구들인 배우 출연료는
물론 없고, 촬영 쫑파티 회식비에 5만원을 썼다. "참, 영화
속 '동대문구 최다 무협시리즈 구비'라는 플래스틱 팻말을
만드는 데 5천원이나 썼어요."
그러니,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선 이야기가 안된다. 야간
실외 장면은 노출 부족으로 벌겋게 번지고, 실내는 형광등
빛으로 창백하다. 배우(!)들 연기도 아마추어 수준 그대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기지와
유머 넘치는 대사, 영화에 대한 진정성이다. 영화 그 자체가
소재이며 주제이고 모티브이며 플롯이다.
한 남자가 건너편 집 여자 옷 벗는 것을 보고 비디오 가게서
빌려온 테이프에 녹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출발한다.
살인자에게 들킨 그는 비디오 테이프를 반납기에 집어 넣은
후 살해당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살인범은 금방
회수된 비디오들 속에서 자기가 찍힌 것을 찾으려 하지만, 회원
가입부터 해야 한다. 신분증을 가지러 집에 갔다 온 동안,
회수된 비디오는 수만개 비디오 더미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제 살인범은 피살자가 즐겨봤다는 액션 스릴러를 통독하기
시작한다. 피살자와 살인범 모두 '너무 많이 본 사나이'인
것이다.
2부 '감독 허치국'은 1부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비가 무려
14배가 뛰었다. 지난 연말 1부 가 공개되자 넥스트 필름에서
5백만원을 지원했다. 출연자도 늘고 스탭도 늘었다. 조명 등
기자재도 다양해졌다. "준비 기간이 짧기도 했지만, 1부보다
밀도가 떨어지고 현실적인 문제를 더 절실히 느낀 기회였습니다.
영화 만드는 데 대한 두려움을 실감하게 됐습니다." 가난과
상상력으로 중무장했던 그가 이대로 곧장 주류 영화로 들어갈지,
내공을 더 닦을 시간을 가질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