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로왕 탄생 신화 서린 언덕…인도서 왔다는 파사석탑도 볼거리 ##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1300여리를 달려와 남해로 빠져들기 직전에
빚은 삼각주에 자리잡은 김해는 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청동기에서 초기 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즐비한 땅이다. 그중에서도 중심가 국도변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은 가야국(가락국)의 시발점을 상징하는 언덕이다. 바로 서기
42년 김해의 아홉 촌장(구간)들이 모여 수로왕을 맞이하면서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어라/그렇지 않으면/구워서 먹으리'하고 부른
의 무대인 것이다.

길에서 완만한 오솔길을 따라 5분쯤이면 오를 수 있는 구지봉 정상엔
여섯 개의 알을 형상화한 석조 기념물이 있다. 이 석조물은 가야국을
세우기 위해 알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수로왕 탄강신화를
형상화한 것으로 1970년대에 김해 시민들이 세운 것이다. 또 그 옆엔
1908년에 세운 '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지'라 새겨진 비석도 있다.
이렇듯 눈에 금방 띄는 정상의 구조물은 모두 20세기에 들어서 세워진
것들이지만, 석조 기념물 근처 소나무 숲 속엔 구지가를 들으며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을 유물이 있으니, 바로 '구지봉석'이라 새겨진 고인돌
(지석묘)이다.

철을 다룰 줄 아는 수로왕 일행은 바로 이 고인돌의 주인들을 장악하고
그들이 신성시한 구지봉 자락에서 새로운 국가를 열었다. 그래서 거북의
머리를 닮아서 구수봉이라고도 하는 구지봉은 100m도 안되는 아주
나지막한 언덕임에도 가야의 후손들에게는 백두산(2,750m)의 위상에
결코 뒤지지 않는 높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가야는 경남 일원의 기름진 분지에 터를 이루고
수백년 이어지며 수준 높은 문화를 가꾸어나갔다. 비록 562년 신라에
복속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개국 초기엔 신라보다
훨씬 수준 높은 철기문화를 이루었던 나라였다. 가야를 흡수한 신라는
땅을 넓히고 인적자원을 보충함과 동시에 문화도 풍부히 살 찌우면서
드디어 고구려, 백제와 동등한 위치에서 힘 겨루기를 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고, 결국 백두대간을 넘고 한강을 건너가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김유신은 바로
전기 가야국의 맹주였던 김해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었으며, 영남의
젖줄 역할을 해온 낙동강의 이름이 '가락의 동쪽에 있는 강'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하니 가야의 시작을 알린 구지봉이 차지하는 위상은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변 볼거리=구지봉의 거북이 몸통 부분에 수로왕비릉이 있다.
능 오른쪽의 파사석탑은 수로왕비가 48년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배에 싣고 왔던 것이라 한다. 수로왕비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아홉 아들 중 두 아들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서로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김해시
중심부에 있는 수로왕릉은 가야를 창건한 수로왕을 모신 능으로 구지봉과
쌍벽을 이루는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지. 또 김해 회현리 패총은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현재까지도 많은 조개껍데기와토기편들이
널려 있어 이곳을 찾는 이를 1500∼2000년 전 가야국으로 안내하고 있다.
구지봉 자락의 국립김해박물관(0525-325-9332)은 가야문화권의 유물을
집대성해 전시한 박물관이다.

■찾아가는 길=남해고속도로 김해인터체인지로 나오자마자 14번 국도를
타고 좌회전해 진해 시내 방향으로 간다. 2km쯤 간 뒤 중심가로 우회전해
구지봉 안내 팻말을 따라 2km쯤 가면 도로 왼쪽에 구지봉이 보인다.
오른쪽은 수로왕비릉이다.

(민병준 여행칼럼니스트 mbjbud@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