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은 '실제상황'(24일 개봉)에서 통제를 담당하는 초자아를
뇌 속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 살해한 채 시뻘건 충동만을 부화시켜 진흙탕에
풀어놓았다. 영화는, 온갖 수모를 겪던 거리 화가(주진모)가 자기 분신이
자극하는대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잔인하게 복수하는 내용을 그린다.
마음의 무덤에서 거친 숨소리를 내던 폭력성이 터져나오는 순간을
백일몽처럼 그렸다는 점에서 이 영화 주제는 '로스트 하이웨이'나
'파이트 클럽' 같은 작품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실제상황'의 거칠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보노라면, 감독이
주제를 한 줄로 뽑아 친 전보를 받아보는 듯 하다. 비슷한 단편 몇편을
모아둔 것 같은 동어반복적 구조 때문에 그 전보는 여러차례에 걸쳐
배달된다. 강렬하고 쉬운 대신 지나치게 익숙하고 지시적이어서 거의
기호에 가까운 김기덕 감독 상징들이 지닌 조야함은 여기서도 반복된다.
밟고 밟히는 관계에 대한 상투적 묘사는 데뷔작 '악어'에 비해
통찰력과 신선도에서 한참 뒤진다.
'실제상황'에서 그는 최대 장점인 회화적 이미지를 스스로 배제했다.
그렇다면 제한된 시간적 배경과 백일몽을 현실처럼 푸는 데서 나오는
긴장과 힘, 혹은 형식 실험에서 나오는 미학적 진전 같은 것을 대신
얻어냈어야 했지만 소득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단 200분만에 찍어낸
이 영화의 모험에 가까운 촬영방식은 애초 구상과 달리 여러 현실적
제약 때문에 화면 내 시간과 화면 밖 시간의 양이 일치하지 않아
실험성의 효용이 줄어들었다. 하루에 찍는 영화일 수록 중요한 것은
직관이었겠지만, 이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뾰족하게 깎은 연필로
저지르는 살인 장면의 독창성이나, 밑바닥 삶에 대한 몇몇 생생한
묘사들은 김기덕 영화가 왜 일부에서 적극적으로 평가되는 지를 보여준다.
주목할 것은 이제껏 '늪'같은 세상에서 서로 물고 뜯는 '악어들'의
관계를 그렸던 김기덕 감독이 '실제상황'에 이르러 한 악어의 내면을
응시하며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해 처음으로 파고들었다는 점.
'컷' 소리와 함께 촬영 현장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실제상황'이
그의 영화이력에서 분기점을 이룰 것임을 암시한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거부하고 5편의 영화를 만들며 충무로에서 잡초처럼
살아남은 김기덕 감독의 질긴 생명력이 가닿을 다음 관문은 어디일까.
(* 이동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