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나오세요." 여러번 외쳐도 반응이 없자 한양대 최래옥(60)
교수는 "총리 지낸 이영덕도 왔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조용했다.
최교수는 "할아버지는 생전에 여학생들을 무척 좋아하셨다"며 "이 자리에
있는 여자들이 모두 일어나 '선생님 나오세요'라고 외쳐보자"고 제안했다.
10여명의 여성들이 일어나 "선생님, 나오세요"라고 외치는 순간 한쪽에
설치된 TV화면에는 고 임석재(1903~1998)선생의 대담모습이 등장했다.

13일 오후5시 한양대 교수식당에서는 우리나라 민속학과 인류학의 기초를
놓은 임석재선생의 탈상을 맞아 큰 스승과 제자들이 다시 만나는 이색
이벤트가 열렸다. 임석재선생은 45년부터 67년까지 서울대 사범대, 67년부터
71년까지 중앙대교수를 지냈고, 무엇보다 사라져가던 우리의 전통민속문화를
기록하고 체계화한 점에서 독보적 평가를 받았던 이 분야 제1세대 학자다.

행사는 비교민속학회(회장 최래옥) 민속학회(회장 인권환) 한국민속학회
(회장 최운식) 역사민속학회(회장 이필영) 실천민속학회(회장 임봉길)
굿학회(회장 김인회)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이종철) 등 7개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제1부 '임석재선생 학문의 조명' 주제의 학술회의는 이미 열렸고 제2부로
마련된 이 행사 '임석재 선생님을 다시 만나며'에는 그의 제자들 12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자 중에는 선생이 31년부터 41년까지 교사로 일했던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중학교 제자들 10여명도 참석했다. 모두 8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이영덕 전총리는 서울대 사범대 제자다.

10여분간 TV를 통해 선생을 다시 만난 참석자들은 36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열린 봉산탈춤 공연을 당시 스웨덴 조류학자 베르그만씨가 영화필름에 담은
7분짜리 영화를 감상했다. 이 필름은 선생이 당시 현장에서 베르그만씨가
촬영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가 60년대말 강문봉 스웨덴대사에게 요청해
입수해둔 것이었다. 그후 첫 공개였다. 민속학자들은 "직접 보니 탈이 훨씬
크고 춤동작도 대단히 장엄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어 생전에 장녀인 동국대 임돈희(57)교수가 녹취해 놓은 것 중 선생이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선생은 경성고보(현
경기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날은 고종의 인산 행사 준비를 위해 운동장에
학생들이 모여있었는데 갑자기 한 선배가 나와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해서
탑골공원까지 나갔다. 난 독립이 돼서 만세를 부르는줄 알고 열심히
소리질렀는데 그건 아니었어"라는 대목에서 행사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학문의 선배이자 은사를 추모해 온 관련 학계가 참여한 훈훈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