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오후 5시 `서울 게임 엑스포 2000' 행사가 열리고
있던 여의도 중소기업 종합 전시관. 넥타이 부대로 가득찬 거리
풍경이 전시관 입구를 경계로 갑자기 바뀌더니 형형색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젊은이들과 짧은 치마를 입은 맵시좋은 도우미
아가씨들이 눈안 가득 들어왔다.
"아마 안으로 들어가시면 더 놀랄 겁니다."
전시장 입구를 지키던 한 젊은이는 "386이 이곳에 들어가면
좀 적응 시간이 필요할 걸요…"라고 충고했다. 전시장 안은 그의
경고대로 난장판. 수십대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게임들이 내뿜는
기기묘묘한 음향, 아케이드 오락기계의 굉음, DDR 댄스음악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록 카페를 무색케 하는 엄청난 소음천지다.
"중얼중얼…" "뭐라구요?"
옆사람 목소리도 컴퓨터 굉음에 묻혀버릴 정도다. 그런데 말이
필요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두하는 10대와 20대들은
중간중간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인터넷 채팅을 하고 있었다. 눈으로
듣고 손으로 말하는 세상이다. 전시장에선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네트워크 게임도 소개하고 새로운 PC방 사업 파트너를 찾는 체인점도
모집한다. 새로운 PC게임 출시나 게임 동네 소식을 전하는 전문잡지
좌판, 게임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케릭터 전시회 등 게임이란 주제로
부스들이 가득찼다.
전시장 한 켠에 부스를 마련한 청오정보통신 배진호 부사장은
"PC게임만을 주제로 한 전시행사가 개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외국에서도 볼 수 없는 게임 열풍"이라고 자랑했다.
게임이 아이들의 오락에서 벗어나 젊은이들의 중요한 문화가 된지
오래다. 게임대회 대진표와 각 게임팀 성적이 신문 지상에 소개되는
세상이 됐다. PC게임으로 먹고사는 프로 게이머가 등장하고, 그들을
내세운 광고까지 전파를 타고 있다. 갓 20세를 넘긴 애송인줄 알았더니
그럴싸한 게임 관련 책자까지 내며 이 바닥 지식으로 인세도 챙긴다.
청강문화산업대는 지난해 "게임 잘 하면 입학시켜주겠다"며 게임대회를
열기도 했다.
네트워크 게임에 열중하던중 게임 채팅 창으로 "우리 회사에서 함께
일해보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취직한 경우도 있다. 대학에는 컴퓨터
게임과도 생겼다. 게임으로 돈 벌고 책쓰고 대학가고 취직하는 세상.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냈을까.
배진호 부사장은 "98년부터 갑자기 불어닥친 PC방 열풍"이라고 잘라
말한다. PC방은 지난 96년 말부터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PC방 없는 주택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업계 추산에 따르면 전국 PC방은
약 1만7000개 정도. 지난해에 비해서도 5000개 이상 늘어난 수치다.
한동안 완만하게 증가하던 PC방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데 결정적인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98년 등장해 PC게임 신화가 된 스타크래프트
(일명 스타크)다. 갤러그, 제비우스로 상징되던 아케이드 오락실이
자취를 감춘 자리에는 어김없이 PC방이 들어섰다. 덕분에 용산 전자상가가
IMF를 너끈히 이겨냈을 정도. 20대들마저 PC방을 약속 장소로 잡는 통에
대학가를 꿋꿋이 지키던 커피숍도 된서리를 맞았다.
PC방 문화는 인터넷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에도 없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인터넷이 미국발 컴퓨터 문화라면, PC방은 한국에서 생겨나
세계로 퍼져간 한국적 문화코드로 해석되기도 한다. 미국에서 탄생한
스타크는 이미 우리나라에 종주국 자리를 내줬다. 스타크 1인자 자리를
두고 신주영·이기석씨 등과 다투는 기욤 패트리씨도 "PC방 천국에서
진검승부를 하겠다"며 한국 땅에 짐을 풀었을 정도.
PC방은 여러 모로 한국적이다. PC방 문화가 없는 미국의 젊은이들과
우리 젊은이들은 스타크 같은 멀티 유저 네트워크 게임을 즐기는 행태부터
다르다. 미국 젊은이들이 집이라는 폐쇄된 개인 공간에서 통신망에 접속해
게임을 즐기는데, 우리는 친구들과 한 장소(PC방)에 모여 팀을 짠다.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은 한꺼번에 수천명의 인원이 사이버공간에서 게임을
즐기며 사이버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한다. 미국이나 일본, 동남아에서
한국을 방문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라는 것도 이 PC방이다.
우리의 PC방과 PC방 문화는 외국으로 수출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야후
재팬 온라인 게임 사이트도 최근들어 접속이 안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 네트워크(또는 온라인) 게임 인기의 전염이다. 게임 일색이던 PC방은
이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우선 386들이 PC방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출장가서
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PC방은 효자이고, 인터넷에 접속해 웹 데스크 공간에서
업무를 보는 데도 PC방은 훌륭한 사이버 오피스 구실을 한다.
주식투자하는 샐러리맨과 주부들을 사로잡은 데이 트레이딩 열풍 현장에도
PC방은 여지없이 끼여 들었다. 증권사 객장 아래층에 문을 연 PC방에는
스타크를 몰라 얼씬도 않던 주부들이 나타나 한 자리씩 차지하곤 온라인
투자에 정신이 없다. 급기야 선물투자 회사들이 서울과 전국의 PC방을 돌며
투자설명회를 여는 진풍경까지 등장했다.게임, 증권, 사이버 사무실 등
끊임없이 용도가 확대되는 PC방.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의
삶을 바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