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 무릅쓰고 스승 病바라지 제자의 마음가짐 되살려야 ##

`학교 붕괴'의 탄식 속에 맞이하는 스승의 날(15일)이다.
선인들 사제관계의 감동을 한양대 정민 교수의 글을 통해
듣는다. (편집자)

"가을에 익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모여 도랑을 이루는
것은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지름길을 찾아
가야지, 뒤얽힌 돌길이나 덩굴진 덤불 길로 향해 가지 않도록
해라."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생활 중에 가르치던 제생들에게 준

글이다. 길을 두고 뫼를 가랴. 방법을 몰라 갈팡질팡하는 후생들을

차근차근 바르게 이끌어 시행착오 없이 사람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인도하려는 스승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40대를 갓 넘겨 시작된 강진 유배가 장장 18년이 지나, 다산은
마침내 57세 나던 해에야 귀양에서 풀려난다. 정든 다산초당을
떠날 때 그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어버이 같이 따르던 스승이 이제
고향 마재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서운하여
풀이 푹 죽었을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소중한 인연을 그냥 끊지 못해 스승과 제자는 다신계를
맺는다. 마재로 돌아온 뒤로도 강진의 제자들은 햇차를 따면 천리
멀리 계신 스승에게 그 차를 보냈다. 다섯 해 뒤, 강진 시절의 제자
윤종삼과 윤종진이 그 먼길을 걸어 스승을 찾았다. 눈물의 상봉을
한 후, 문안이 끝나자 다산은 대뜸 묻는다. "동암에는 지붕을
이었더냐?" "금년에 이었습니다." "홍도는 다 말라 죽지 않았구?"
"너무 싱싱합니다." "우물 가 돌은 무너지지 않았느냐?"
"괜찮습니다." "연못의 잉어는 얼마나 컷누?" "두 자나
됩니다." 그 묻고 대답하는 정경이 그대로 그려진다. 다산은 이를
글씨로 써 제자에게 기념으로 주었다.

조선 중기의 시인 석주 권필이 강화도에 은거해 살 때, 멀리
충청도 회덕 땅에서 송희갑이란 청년이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제자되기를
청하며 강화까지 걸어서 그를 찾아왔다. 그는 초당에 거처하면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공부에만 힘을 쏟았다. 석주가 장티푸스에 걸려
40여일간 사경을 헤맬 때는 십리도 넘는 살림집까지 하루 세 번씩
달려와 문안하고, 물고기를 잡고 땔감을 해 날랐다. 종내는 그도
그 병에 전염되어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미안했던 스승은 그 제자의
일을 시로 적어 고마운 마음을 남겼다.

"사람이 천하를 널리 보지 못하면 시가 또한 움츠려들고 만다. 너는
중국말을 배우고 수영을 익혀,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가 천하를 두루
보아 그 기상을 넓히도록 해라."

스승의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던 제자는 날마다 강화 앞 바다에 뛰어
들어 수영을 익히다가 바닷물에 기혈이 삭아 그만 병이 들어 일찍 요절하고
말았다. 시키는 스승이나 하란다고 하는 제자나 안스럽기는 매일반이지만,
그 스승과 제자 사이의 끈끈한 정의 유대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제자의
요절을 안타까이 여겨 스승의 친구인 조찬한은 〈송생전〉을 지어 그 삶을
기록으로 남겼다. 우암 송시열도 자기의 편지에다 송생의 죽음에 얽힌 위의
일을 적었다.

오늘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아무 계산 없는 도타운 정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선생의 이름이 참 값없이 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예전에 선생이란 말은 만인의 사표가 될 수 있는 큰 스승에게만 붙이던
호칭이었다. 그러던 것이 종내는 그저 '미스터'의 뜻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고, 학생은 있어도 제자는 없다고들
한다. 돈 주고 배우니 선생 알기를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자 쯤으로
안다. 없는 권위를 세우자니 권위주의만 남은 것이 우리 교육계의 풍경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이덕홍이 스승의 투병과 운명까지의 순간순간을
일기체로 적은 〈퇴계선생고종기〉나, 역시 스승 남명 조식의 임종을 곁에서
지켰던 정인홍의 〈남명선생병시사적〉 같은 글을 보면 스승을 향한 제자의
마음가짐이 거룩하게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옛 선인들 앞에 부끄러운 것이
어디 이것 뿐이랴. (한양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