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국 식민통치가 남긴 고통과 분노, 공포가 생생하게 남아있던
1950~60년대 아일랜드 서부 농경지대에서 자라났다. 그 무렵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너그럽지 못한 분들이었다. 영국인들은 800년 동안
우리들의 땅을 빼앗고, 법을 바꾸고, 고유 언어를 빼앗았을 뿐더러,
「아일랜드인은 열등한 야만인」이라고 세뇌시켰다. 우리 국민들을
붙잡아다 목을 베고, 고문하고, 감옥에 처넣었다. 오랜 독립투쟁 끝에
1922년 독립했지만, 가혹한 식민통치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됐다.

나이든 오코너 교장선생님은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위압적인 풍채를
지닌 분이었다. 목소리는 금속판이라도 뚫을 것 같았고, 푸른 눈동자는
찌르는 듯했다. 그 분은 무겁고 두꺼운 걸상 다리부터 가느다란 불쏘시개
막대기와 지도를 가리킬 때 쓰는 지휘봉까지 다양한 회초리를 예고없이
휘두르는 데 명수였다. 선생님이 불시에 두껍고 거친 손바닥을 휘둘러
우리들의 조그만 얼굴을 철썩 갈길 때면, 눈 앞에 별이 번쩍이곤 했다.

그러나 우리들을 진짜 괴롭혔던 것은 교장선생님의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아이들을 사정없이 무안주는 고함소리였다. 학생들 중 누군가가
산수 문제를 틀리거나, 국민시인 예이츠의 시구를 잊어버리면 교장선생님은
당장 『황무지로 꺼져버려』라고 고함치셨다. 우리나라는 당시 국토
전체가 황무지였고 「황무지」는 가난과 무력의 상징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왜 황무지를 저렇게 경멸하시는지 혼란스러웠다. 날씨가
좋은 여름날이면 나는 탁트인 황무지에 앉아 늪지에서 풍기는 달콤하고
축축한 이탄 냄새와 히스풀 냄새를 맡곤 했다. 미풍이 내 귓바퀴와 들꽃을
간지럽혔고, 마도요새들이 지지배배 울며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록 이탄밖에 없는 벌판이었지만, 그 곳은 아름다웠다.

학생들은 모두 교장선생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 분이 은퇴한 뒤에도 나
말고는 아무도 찾아가 뵙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을 통해 식민통치가 우리
땅과 재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자긍심에 깊숙이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배웠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곳곳에서 「아일랜드인과 개는 사절」이라는 간판과 마주쳐야 했다.
가난하고, 땅도 없고, 권력도 없는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들의 학대에
지쳐 결국 「우리는 정말로 열등국민인가보다」하고 자포자기하게 됐던 것이다.

성탄절이 되면, 교장선생님은 내가 세계 어느 곳에 있건 꼭 카드를
보내오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30년 만에 고향에 돌아갔을 때, 나는
선생님 댁에 찾아갔다. 선생님은 80대 노인이 되어 있었다. 눈빛과 목소리는
부드러워지고, 주름진 얼굴 양편으로 백발이 흘러내렸다. 선생님은 성탄절
때마다 내가 수십 년 전 선생님께 보낸 카드를 꺼내 본다고 하셨다. 40년간
교직생활을 통해 그 분이 학생에게 카드를 받은 것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선생님은 아일랜드 고유어인 갤어 억양으로 『실르야』하고 말을 거셨다.
그 분은 결코 영어식으로 나를 「실라」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린시절
선생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영어로 말하지 말고, 갤어로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마음 속에 온갖 모순이 뒤얽혀있긴 했지만, 결국 그 분도
아일랜드를 깊이 사랑하셨던 것이다.

『실르야, 귀국한 뒤 맨 처음 뭘 했니?』 나는 잠깐 침묵했다.
『황무지에 갔어요.』 선생님 눈가에 물기가 젖어들었다. 여름 햇빛이
선생님과 내가 마주보고 앉은 식탁 위로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한참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네가 다섯 살쯤 됐을 때,
내가 아이들에게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면 제일 먼저 뭘 보냐」고
물었던 걸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그때도 내게 「황무지」라고
대답했단다.』

(실라 컨웨이·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