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너절하고 인간은 볼품없다. 삶의 초라함에
착목한 많은 이들은 연민으로 인간 존재를 바라본다.
그러나 홍상수는 연민에 침을 뱉고 고개를 돌려
천박함에 대한 조소를 택한다.
28일 저녁 제1회 전주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공개되는 '오! 수정'은 사랑과 욕망, 인간과 세계를 보는
홍상수 감독의 냉소적 태도가 소름 끼치도록 매력적으로
관철된 수작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 단 2편으로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감독이 된
홍상수의 이 최신작은 올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진출했다.
'오! 수정'은 지금까지 나온 홍감독 영화 중 가장 주제가
좁고 밀도가 높은 작품이라 할 만 하다. 한국영화로는
30년만에 처음 흑백으로 제작된 것도 이채롭다.
섹스
코미디에 가까운 이 영화는 방송작가 수정(이은주)과
화랑을 경영하는 부잣집 아들 재훈(정보석), 그리고
수정의 상사인 PD 영수(문성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사랑이라 믿고 있는 것의 실체를 까발리는데 집중한다.
홍감독이 순수한 사랑을 믿을 리 없다.
그는 유예된
욕망의 조급함과 욕망 충족 과정의 비루함, 충족된
욕망의 허망함을 그릴 뿐이다. 수정과 마침내 관계를
가진 재훈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목숨 걸고
지킬게요"라고 약속할 때 씁쓸한 맛이 남는 것은 그
무거운 맹세가 사실 얼마나 가벼운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5부로 구성된 이 영화 1,2부는 재훈 시점으로 3,4부는
수정의 시점으로 표현된다. 같은 경험에 대해 두 사람이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차례에 걸쳐
반복해보여주는 것이 흥미롭다, 얼핏 장난스런 변주
같지만, 감독은 놀라운 관찰력으로 남녀 행동과 사고
양식을 정형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을 담아내는
최후의 그릇인 추억까지도 상대적임을 강조하는 화술은
결국 진리란 입장에 따라 다른 것이거나 아예 없는
것임을 말한다.
홍감독 영화에서 언제나 그랬듯, '오! 수정' 대사는
들리는 것과 담긴 것이 다르다. 인물들이 뱉어내는
문장의 너저분한 내용은 화자 입장만 지시할 뿐
무의미하다. 진짜 의미가 담긴 것은 그 문장이 튀어나올
때의 뉘앙스이고 거기에 배있는 감독 자신의 촌평이며,
그 촌평 마디마디에 새겨진 것은 물론 냉소이다.
그
비웃음은 영화 속 첫 관계 후 놀란 척 혈흔을
자랑하는 암컷과 흔적 없이 사라질 쾌락을 위해 약속을
남발하며 달려드는 수컷을 포함한 세계 자체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그 냉소 대상이 감독 스스로를 비롯, 누구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 그의 영화를 버텨내기가 힘든 것은
우리가 해대는 짓거리들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때문이다. 극장 개봉은 5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