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의 신' 상석에 모셔..."저승보다 이승 중시" ##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 먹으면 늙거나 죽지 않는다는 불로초와
불사약,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옥황상제…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이런 이야기들은 중국의 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불교, 유교와 함께 중국 3대 종교의 하나로 꼽히는 도교는
중국 문명권의 여러 나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왔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많은 민중 반란에 도교가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었을 정도로
보통 사람에게는 유교나 불교보다도 더 큰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도교는 불교, 유교에 비해 훨씬 정리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불교나 유교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분파가 발생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석가모니나 공자가 세워놓은 기본 틀 속에서의 분화였다. 이에
비해 도교는 노자와 장자 숭배, 신선사상, 내면 수련법 등 다양한 흐름과
요소들이 그 안에 포함돼 있다. 그래서 많은 종교학자들은 "도교에는
중국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 전통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도교는 서기 2세기 무렵 중국 서부 사천성 일대에서 시작됐다. 후한 시대
장릉(?~156)이란 사람이 이 지역에서 최초의 도교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는
신도들이 교단에 들어올 때 다섯 말의 쌀을 바치도록 했기 때문에 '오두미도'
라고 불렸다. 장릉은 원래 '오경'에 통달한 유학자였는데 그것이 '장생불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도를 닦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릉은 '도'를 얻은 후에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면서
세력을 넓혀갔다.

장릉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그 후 오두미도는 그의

아들 장형과 손자 장로에 계승되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오두미도에서

이들 장씨 3대는 각각 천사, 사사, 계사라고 불린다. 이중 특히 장로(?~216)는

‘노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교리를 체계화했으며 후한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사천성 일대에 독자적인 종교 정권을 세워 30년 가까이 통치했다. 또

위의 조조에게 투항하여 오두미도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게 함으로써 오두미도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발판을 만들었다.

이처럼 도교의 발상지이기에 오늘날 사천성 일대는 도교의 영향력이 강하고
도교와 관련되는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도교의
성지로 꼽히는 곳은 사천성의 중심 성도 서북쪽에 있는 청성산이다. 이곳은
장릉이 도를 얻은 곳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따르는 도사들의 순례지였으며
지금도 도교의 의식과 의학, 무술이 그대로 행해지는, 살아있는 도교의 현장이다.

성도에서 청성산으로 가는 데는 두 시간 남짓 걸렸다. 거리는 약 50km 밖에
안되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청성산 입구에
도착하자 멋들어진 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지붕 위에 도교의 이상인
신선들의 조각이 달려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높이 1260m의 청성산에는 한때 70개에 이르는 도교 사원들이 있었다고 하며
오늘날에도 30여 개가 남아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상청궁과 장릉이 도를 닦은 곳에 세워진 천사동이다. 이밖에도 옥청궁,
조양동, 건복궁, 원명궁 등 유명한 도교 사원들이 즐비하다.

먼저 케이블카를 타고 상청궁으로 올라갔다. 상청궁 입구에는 앞뒷면에 '도' '대도무위'(큰 도는 인위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쓴 커다란 돌이 놓여
있었다. '상청궁'이란 현판은 장개석이 쓴 것이라고 한다. 문 안으로 들어갔더니
도가 의학을 소개하는 곳과 도교 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파는 물건 중에는
'불로초'도 들어 있어 도교의 고향을 실감케 했다. 불로와 장수에 대한 도교의
관심은 자연히 의학을 발전시켰고 이는 중국 의학의 토대가 됐다고 한다.

상청궁에서 청성산 중턱에 있는 천사동까지는 걸어서 약 40분이 걸린다.
천사동은 수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세워진 수십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청성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교 사원이다. 또 당 현종, 청 강희제의
친필 등 이곳을 찾은 수많은 고관과 문인, 지식인들이 남긴 각종 글씨와 자취가
풍부하다.

장릉이 도를 닦았다는 곳은 천사동 건물들의 뒤쪽 천연 동굴이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는 그의 좌상이 놓여 있었다. 천사동에는 또 장릉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그가 팠다는 연못, 붓을 씻었다는 나무통 등이 남아
있다. 이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천사동에서 500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항마석'이다. 동굴에서 도를 닦던 장릉은 하늘에서 엄청나게 큰 돌이
자기에게 날라오는 것을 보았다. 마귀의 장난인 것을 알아차린 장릉은
칼을 들어 돌을 내리쳤다. 땅에 떨어진 돌은 가운데가 갈라졌다고 한다.
지금 그 돌에는 청나라 말기에 61대 천사였던 장인정이 썼다는 '항마'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천사동을 나오는데 정문 바로 뒤의 '재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도교
사원들이 대부분 돈을 주관하는 신을 좋은 자리에 모시고 있다는 점은
도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성도의
가장 큰 도교사원 청양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수' '복'이라고 쓴
글씨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종교가 이승보다는
저승을 중시하는 데 비해 도교는 현세에 절대적 비중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학자들은 보통 도가철학과 도교를 구분한다. 전자가 '노자' '장자'
'열자'와 같은 중국 고대의 사상서에 나타난 철학체계인 데 비해,
후자는 중국 역사 속에서 다양한 교단과 파벌을 통해 발전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도가철학이 민간 신앙 전통과 만나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도교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하는 도가철학을 어떻게 '장생불사'를 기본 목표로
하는 도교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는지, 중국인들의 위대한 현실주의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 성도(중국)=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