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는 눈 가진 수집가들이 한국미술의 힘...값부터 따지면 2류" ##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의 이름은 어느덧 한국
현대미술사 신화의 한켠에 당당하게 자리한다. 여고 졸업 후 열여덟살
앳띤 나이에 이 나라 미술시장 중심에 뛰어든 지 40년, 그리고 지금은
그 자신의 이름과 동의어가 돼버린 현대화랑을 문연 지 올해로 꼭 30년.
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뒤안에서 일했지만 그는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가장 힘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됐다. 그가 처음 화랑을 개업했을 때 신문들은
『예술을 팔고 삽니다』라는 제목으로 이 신기한 업종의 등장을 알렸다.
우리 사회 다른 분야가 그렇듯, 그의 화랑 인생 30년에는 다른 나라라면
100년도 넘게 걸렸을 미술사의 우여곡절이 함축돼 있다. 오는 4월 4일
국내 화랑으로선 처음으로 개업 30주년을 맞는 현대화랑 박명자(57) 대표를
김태익 문화부장이 만났다.

―사실 현대화랑 30년도 중요합니다만, 박여사의 화랑 인생이 올해로
40년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첫 화상의 탄생이랄까….

『제 개인 일생이 화랑사가 됐고, 그 화랑사가 다시 한국의 미술사가
된 것 아닌가 감개무량할 때가 많습니다. 제 첫 직장이, 반도호텔에 여섯평
남짓한 공간에서 운영됐던 반도화랑이었어요. 아세아재단이 운영하고 나중에
예술원 회장을 지낸 이대원 화백이 책임자셨어요. 실무는 제가 거의 맡았던
셈이지요. 이상범 박수근 도상봉 김인승, 쟁쟁한 화가들의 작품을 걸었지요.
당시 동아·화신 백화점 같은 곳이나 중앙공보관에서 화가들이 전시를 했지만,
그림을 돈주고 산다는 것 자체를 일반인은 생각하기 힘든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외국을 다녀본 운보 선생 부부가 제게 화랑을 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1970년 4월 인사동에 문을 연 게 현대화랑이었습니다. 「현대화랑」이란
이름은 풍곡 성재휴 선생이 지어주셨고, 팜플렛의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선생이
써주셨어요.

―당시 화랑 분위기는 어땠었나요.

『도대체 그림을 팔아준다는 게 그때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요. 작가
선생님들은 저를 「미스 박」하고 부르며 귀여워해주셨지요. 소정(변관식)은
결혼한 저를 심지어 「박양」이라 불렀어요.』

―계량적으로 지난 30년 변화를 얘기해 본다면 어떻습니까. 그간 그림은
몇점이나 팔았다고 기억하십니까.

『판 것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지만, 전시만 300여회, 건 그림만도 1만점은
족히 될 겁니다. 60년대 중반은 샐러리맨 월급이 6000원인데 박수근 선생 작품
한점이 3000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 박수근 유화 한점이
3억원 가량 하니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난 겁니까. 저 혼자 「공(0)을 치다
30년 다 보냈다」 생각하고 속으로 웃곤 합니다.

―박수근 이중섭 등 교과서에 나오는 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한
당사자로서 그들에 대한 잊지 못할 삽화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요.

『60년대 반도화랑에 오셔서 커피와 스폰지 케익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원로는
두 분이셨죠. 청전 이상범 화백과 문인화 대가였던 김용진 화백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수근 선생이 매일 화랑으로 출근하다시피 했어요. 자신의 그림이 팔렸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다 혹시라도 술친구를 만날까 기대도 있었겠죠. 그런데
나중에 그 부인이 쓴 글을 보니, 당시 건강으로 고생하던 박수근 화백이 호텔의
양변기를 사용하기 위해 왔었다는 겁니다. 저도 월급이 적어 제대로 대접못해
마음이 아팠지요. 』

―현대화랑이 국내에서 가장 크고 전통있는 화랑이라선지 명예와 비판도
중첩되곤 합니다. 비판 중 하나가 한국 미술시장의 그림값이 너무 비싸고,
그 책임의 일부가 현대화랑에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인데요.

『예술에서 가격과 금전적 가치를 먼저 생각하면 언제나 2류를 면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겪은 대표적 사례를 먼저 얘기할까요? 우리나라
그림값의 가장 큰 문제는 시장가격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임의로 정하는 데 있다는 말을 많이 하죠. 20년 전 서양화가 Y선생님이 제가
존경하는 분이었는데 하도 그림값을 올리겠다고 해 저하고 다툰 적이 있습니다.
전시회가 끝나고 제가 1700만원 가량을 갖다 드렸는데,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
그 댁에 갔다가 선생님이 그중 1500만원을 어느 대학에 장학금으로 기증한
영수증을 우연히 보고 무척 부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서양화가 유영국 선생님
역시 그림값이 비싸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이란 사회가 그분이 큰 예술가가 되는 데
보태준 게 뭐 있습니까. 그분은 도통 그림을 파는 일에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그리곤 자신의 가장 걸작 그림 5점을 미련없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셨죠.
IMF 때 돈입 급한 집에서 많은 그림들이 시장에 나왔지만 정작 대가들의 걸작은
안나왔습니다. 그림을 산 사람들은 대부분 예술이 좋아서 사는 것이지 투기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컬렉터들은 우리 문화를 떠받치는
든든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상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작가의 반대편에는 컬렉터가 있는 것 아닙니까.
역대 대통령 중에선 누가 가장 그림을 좋아했고, 조예가 깊었나요.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박 대통령은 69년인가 미국·독일 방문을
하게됐는데, 그림을 선물로 하겠다고 사람을 보내셨어요. 청와대에 들어가
청전과 심산의 열폭 병풍을 보여줬는데 문제는 청전 병풍에 그려져 있는
초가집이었어요. 박 대통령은 못사는 나라란 인상을 주기 싫었던 거지요.
육여사가 옆에서 『저는 청전 그림이 더 좋은데요』라고 거들었습니다. 결국
청전 것은 미국에, 심산 것은 서독에 보내졌죠. 값이 청전 것이 당시 60만원으로
10만원 더 비쌌습니다. 박대통령 다음으론 현 김대중대통령이 그림에 조예가
깊으시단 인상을 받았습니다.

―다른 대통령들은요?

『그만 하지요.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서예나 골동을 많이
알고 좋아해 생신 때면 선물로 경무대로 많이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미술과 권력보다는 미술과 재벌의 상관관계가 더 클 것 같은데요. 재벌가의
콜렉터로 기억나는 분은 누구입니까.

『작고한 이병철 삼성회장이지요. 그 분은 아마도 한국 현대미술에서 본격적인
첫번째 콜렉터, 패트론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71년 당시만 해도 그림이
거의 팔리지 않을 때인데, 삼성에서 어느날 사람이 왔어요. 회장님 지시라며,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이란 100호짜리 그림을 100만원에 사간 거에요. 그
당시 삼성에선 작품 크기 불문하고 좋으면 100만원에 사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해요. 작가들은 신이 났죠. 이게 오늘날 방대한 호암 컬렉션의 기초가 된
셈입니다.』

―미술시장의 중심에 계신 분으로서 한국의 지난 30~40년을 요약하신다면?

『동양화에서 서양화로 넘아간 시기라고 할 수 있죠. 70년대 말이 변화의
기점이라고 할까요? 그 이전엔 청전(이상범)의 그림값을 박수근이 따라가지
못했는데, 지금은 박수근 그림값이 청전의 서너배 됩니다. 주거양식 사고방식의
변화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

―좋은 화상의 조건은 어떤 겁니까.

『「신뢰」와 「안목」이 생명입니다. 어떤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작가에게,
콜렉터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면, 당장은 돈을 손에 쥐더라도 오래 못견딥니다. 또
다른 덕목은 좋은 그림을 보면 찡하고 감동을 느낄 줄 아는 능력입니다. 저는
화가가 인간성이 아무리 좋더라도 작품이 않좋으면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미술 발전을 위해선 좋은 화가, 좋은 화상, 좋은 컬렉터 3박자가
갖춰져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작품을 창작하는 화가 아닙니까?
화가들에게 한 마디 하신다면.

『이젠 컬렉터의 눈이 엄청나게 높아졌다는 걸 작가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그림값은 선-후배도 없고 같은 작가 작품이라도 가격은 하늘 땅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결국 성실하고 창의적인 작품 질만이 예술가의
존재를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