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계룡산 신원사 국제선원. 불가에서 겨울철 석달간 참선 수행하는
관습인 동안거를 마친 스님 20여명이 선원 문을 나섰다. 최근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현각스님도 일행에 끼여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훌쩍한 키, 우수에 찬 얼굴, ?빡 깍은 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선승이 눈에 띄었다.

빅토르 펠레빈(38). 요즘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기작가다. 미국의 영향력있는

잡지 뉴요커가 94년 「가장 뛰어난 세계의 젊은 작가 6인」 중 한사람으로

꼽았으며, 뉴욕타임스 매거진이 프론트면 기사에서 『러시아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격찬했던 인물.

펠레빈은 작년 9월 짐을 꾸려 모스크바의 아파트를 나섰다. 두 달간의
독일체류를 거쳐 한국으로 온 그는 90일 걸친 동안거, 그 긴 침묵에 들어갔다.
그는 왜 한국에 왔을까?

『소설 몇편으로 세계에 알려졌지만, 내가 누군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로 표현하는 사상에는 한계가 있다.
사상의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참선 뿐이다.』 그가 월간문학지
현대문학 3월호에 실릴 예정인, 중앙대 김근식교수와 대담에서 밝힌 말이다.
그는 선에 대해 『종교도 기도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삶의 일부이며, 삶 그
자체다』고 말했다.

그는 5년 전 숭산스님을 제발로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 하버드대
학생 폴 뮌젠을 현각 스님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큰 스님이다. 펠레빈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3번째.

펠레빈은 러시아 젊은 세대의 우상이다. 러시아 청년들은 그의 소설을
인터넷에 띄워 돌려보고, 나이트클럽에서는 그의 책을 서로 교환해 본다. 그의
책은 지금까지 러시아에서만 100만부가 팔려나갔다. 작년 가을 러시아 녹색당은
그를 2000년 총리 후보로 옹립하기도 했다.

그가 젊은 세대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러시아 작가들이 대부분
과거의 상흔에 집착해 있는 것과 달리, 러시아의 오늘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주의 붕괴이후 계속되는 경제난과 정치혼란 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의 오늘과, 그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 세대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김근식 교수는 『소비에트 시절 구시대 작가들의 사고 틀을 벗어나
젊은 층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펠레빈의 작품은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소년의 꿈과 좌절을 그린 첫 소설
「오몬 라」(1993)에 이어, 「부처의 새끼손가락」, 「블루 랜턴」, 「노란
화살」, 최근 발표한 「제너레이션 P」 등이 잇따라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미국에서 그의 소설은 출간되는 대로 속속 번역될 정도로 인기다.

동안거를 끝낸 펠레빈은 화계사에 잠시 머물다 23일 러시아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