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창간은 3.1 운동의 민족적 함성이 가져온 열매였다. 자연히
조선일보의 80년은 민족과 함께 해온 역사였다. 강제 병합 후 9년, 제3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는 부임 다음날인 1919년 9월3일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4개항의 훈시를 발표했다. 그 세번째 항이 "언론 집회 출판 등에
대하여는 질서와 공안유지에 무방한 한 상당히 고려를 가하여 민의의 창달을
계하여야 한다"였다. 민간지의 발행허가를 공식 천명한 것이었다.

1919년 10월까지 수십여건의 발행신청이 총독부에 몰려 들었다. 총독부는
그중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 3종만을 1월6일 허가했다. 당시 언론관련법인
'광무신문지법'에 따라 2개월후인 3월5일까지 신문을 발행치 않으면 발행허가는
자동취소였다.

1919년 9월경 발족한 '조선일보 설립 발기인조합'은 3·1독립선언 1주년인
3월1일을 창간목표일로 삼았다. 그러나 총독부가 허가해줄 리가 없었다. 의욕만큼
창간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실업인들의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 주요 간부들이
발기인조합에 관여했지만 대정친목회 차원의 대대적 지원은 받지 못했다. 39명의
발기인중 대정실업친목회원은 11명이었고 나머지는 금융인 변호사 의사 교육가
일반실업가 등으로 구성됐다. 발기인 중에는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양정중고의
전신 양정의숙 설립자 엄주익 등도 포함돼 있었다.

발기인조합이 발행허가 접수 때 정한 자본금은 20만원이었으나 실제 불입액이
5만원에 그친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합방에 찬성했던 인사가 일부 포함된
대정친목회와의 어쩡쩡했던 관계는 결국 창간5개월만인 1920년 8월12일 완전히
청산했다고 1920년 8월15일자 조선일보는 사고를 통해 밝히고 있다.

조선일보 창간은 예종석과 최강의 쌍두마차가 이끌었다. 총독부 허가를 받을 때
발행인이 예종석, 편집인이 최강이었다. 최강은 초대 편집국장까지 맡았다. 이들은
발행취소 마지막 시한인 3월5일 서둘러 조선일보 창간호를 발행했다. 암흑의 일제
치하에서 10년만에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신문을 받아본 조선인들의 감격은 말할
것도 없다. 입에 올리기도 힘들었던 망국의 국호 '조선'을 매일 지면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어 다음달에는 발행취소 시한을 넘겨 동아일보 시사신문이
창간됐다.

3호 1면 '창간기념호' 제목의 배경은 '조선통보' '동국중보'
'삼한통보' 등 우리나라를 지칭했던 이름들이 들어간 주화들을 넣었다.
창간8호부터 제호의 배경에는 조선왕조의 상징 '봉황'이 들어갔다. 총독부의
강권통치하였지만 민족의식 고양을 위해 신문제작자들이 얼마나 머리를
짜냈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들이다. 창간 직후 활동했던 기자들의 명단에서
소설가 박종화와 현진건의 이름도 확인된다.

창간 때 조선일보 1부 가격은 3전이었다. 한달 구독료는 60전. 80㎏ 쌀
한 가마가 23원81전이었으니 쌀 너 되 값이었다. 신문발행도 숨에 찰 지경인 데
가정배달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주요 거점 지역에 신문이 배달되면 배달원들이
신문을 들고 뛰었다. 그런데 이게 구경거리였다. 신문사 제호를 쓰고 앞 뒤로
방울 4개를 단 저고리를 걸쳐 입은 배달원. 이들은 1920년 3월 5일 창간호를
받아 들고 거리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맘껏 "조선일보 창간이요! 조선일보
나왔습니다!"를 외쳤을 것이다. 불과 1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던 그
목소리 그 열정 그 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