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고대 등 명문대 영문과에 영문학을 전공한 영어권 외국인
교수가 한명도 없다. 정규 커리큘럼에 포함된 영어회화 능력, 작문
능력을 키우기 위한 과목도 몇 개 안된다.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사설학원에 다니거나 어학 연수를 가지 않고서는 영어로 말하고 쓰는
능력을 기르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2000년 1월 현재 서울대 영문과에는 교수 18명, 부교수 4명, 조교수
1명, 전임강사 6명 등 한국인 교수진 29명과 영미권 외국인 강사 2명이
재직중이다. 강사들은 전공과목 개설과 강의에는 관여하지 않는 계약직이다.
이들은 영어회화, 영작문 등을 담당하다 1년간의 계약기간이 지나면
본국으로 돌아간다. 외국대학 교수들이 한미교육위원회 교환교수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해오는 경우 전공과목 강의를 맡기도 한다. 95년
이후 서울대에서 전공과목을 맡은 외국인 교환교수는 2명뿐이다.
지난 95년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A씨는 학창시절 영미권
네이티브스피커(원어민) 강사에게 「영작문」 「영어회화」 등 3과목을
들었다. 졸업 이수학점 130학점중 전공으로 메워야 할 학점은 42학점.
A씨는 나머지 학점을 「18세기 영국 소설」 「셰익스피어」 「중세
영어」 등 정통 영어영문학 과목들로 채웠다.
A씨는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일상생활에서 실무에 응용할 수
있는 영어교육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지만, 학교에서 커리큘럼을 통해
이런 욕구를 채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보통 15~20명 안팎이 듣는 다른 전공수업과는 달리, 영어 시사잡지를
읽고 영어방송을 녹취하는 「시사영어연구」 과목에는 타과생까지 60~70명이
몰려들었어요. 학생들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비해, 영문과 커리큘럼은 영어사,
영문법 등 영어학 과목과 18세기 영문학 등 문학과목을 대략 3대 7 비율로
배분한데서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학창시절에는 영문학 자체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큰 불만이 없었는데, 막상 졸업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더군요.』
졸업후 외국어 교재를 내는 출판사에 들어간 A씨는 대학 때의 전공
덕분에 외국인을 상대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A씨는 『외국인과 회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 외국인 바이어들을 상대할 때면 진땀이 났다』며
『외국인과 업무를 보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을 익히는 데 몇 달이
걸렸다』고 했다.
99년 1학기 현재 「인문대학 교과과정 및 참고규정」에 명시된 영문과
개설과목 30여개중, 말하고 쓰는 능력을 키우는 데 목적을 둔 강좌는
영어회화1~3, 영작문 1~3 등 6과목에 불과하다. 많은 영문과 교수들은
『영문과는 문학을 하는 곳이지 말 배우는 곳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구사하기도 한다.
A씨는 『대학원생들과 교수들도 영문과 커리큘럼이 구식이라는 지적은
많이 하지만,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꺼린다』며 『학번당 35명밖에 안되는
소규모 집단이기 때문에 금방 말이 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문과 대학원을 수료한 B씨는 99년 국내에서 열린 한 영문학 워크숍에
참석했을 때의 경험을 털어놨다.
『강의와 발표는 주최측에서 준비한 자료를 보면서 어찌어찌 해결했지만,
강의가 끝난 뒤 연구자들끼리 다과를 들며 자유롭게 어울리는 시간이 되자
무척 곤혹스러웠습니다. 외국인 발표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말할 자신이 없어 결국 한국인 동료들끼리 무리지어 서 있는 곳에 섞여있었죠.』
교수진 11명이 재직중인 고려대 영문과에도 외국인 교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고려대는 『교수 채용 공고를 낼 때마다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한다고 명시하지만, 실제로 외국인 교수를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편 적은 없다』고 밝혔다. 연세대의 경우 전체 교수진
18명중 2명이 외국인이다.
익명으로 조선일보에 전화를 걸어온 한 지방대학 영문과 교수는
『총장실에 외국손님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영어를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이 들통날까봐 일부러 연구실을 비우는 영문과 교수들도 있다』고 전했다.
해방후 50년 동안 「학문」으로서의 영어를 강조해온 영문과 교수들에게
『대학이 영어로 말하는 인간을 길러내야 한다』는 시대적 압박은 고민거리다.
서울대 영문과 학과장을 맡고있는 박희진 교수는 『60년대 미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1세대들의 경우 일제치하와 해방후 열악한 환경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현지에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분투했다』고 전제하고, 『한국 영문학도들이
말하는 능력을 키울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외국 학회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학생들에게 말하고
쓰는 기본적인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는 충분히 공감한다』며
『앞으로 교수 공채 때 외국교수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는『80년대 후반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 영문학 세미나에서 해외 유학
경험이 전혀 없는 북경대학 연구원이 유창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나중에 「북경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모든 영어수업이
영어로 진행됐기 때문에, 영어를 말하는 데 대한 공포감이 없다」는 설명을
듣고 무척 놀랐다』고 했다. 서울대는 2000년 1학기부터 모든 신입생에게
원어민이 진행하는 실용영어 과목(3학점)을 필수적으로 이수하도록 할 방침이다.
C 교수는 『학생들의 실력이 부족하고, 실용영어에 대한 수요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 정규 커리큘럼에서 「How are you? Fine,thank you」를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이 고민』이라며 『실용적 목적과 함께 지적 호기심도
충족시킬 수 있는 교육과정을 마련하는 데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D 교수는
『언론과 사회가 대학에 대해 사설 영어학원같은 기능을 수행하도록 강요할
경우, 미국에서 햄버거를 사먹을 수 있는 인간은 기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에 햄버거를 팔 수 있는 인간은 결코 만들지 못할 것』이라며 『대학과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