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의 선거운동 시대가 열린다. 여야가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87조를 개정 또는 폐지하는 데 뜻을 같이 함으로써
제5권력이라 불리는 NGO들이 정치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돼,
우리나라 선거와 정치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지난 10일
경실련이 공천 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해 파문을 일으킨 지 8일 만의
대변화다.

그러나 87조가 개정되더라도 선거운동 시작일(3월28일) 이전의 선거
운동은 사전 선거운동으로 여전히 불법이다. 시민단체는 한마디로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다. 시민단체들은 3월28일까지의 불법 기간중에도 낙천-
낙선운동을 강행하고, 3월28일 이후의 합법 기간중엔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18일 경실련이 의원들의 국회 출석 상황을 공개한 데 이어, 20일엔
총선시민연대가 낙천 대상자 명단 공개를 강행한다. 이 명단 공개는 또
다른 파장을 낳을 전망이다. 시민연대는 곧이어 낙선운동 지지 서명운동에
돌입하고, 1월말엔 서울 등 전국 대도시에서 부정 정치인 추방 궐기대회를
연다. 경실련은 2월초부터 선거법에 대한 시민불복종 운동에 들어가고,
시민연대는 낙선운동에 대한 대국민캠페인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선관위
및 검찰과 시민단체들, 그리고 정치권의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3월28일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양상은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단체의
선거운동이 합법화되면서 시민연대나 경실련 외에 전국의 수많은 각종
단체들이 일제히 선거운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저마다 각
지역에서 특정 정당 후보를 지목해 낙선 혹은 지지 운동에 나설 경우, 선거
질서는 크게 위협받을 수 있다. 이 경우, 각 후보들이 특정 단체를 위장
단체로, 또는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고발사태가 올 가능성도 있다.

합법 기간중 시민연대와 경실련은 미리 지목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본격
낙선운동에 나선다. 시민연대는 곧 지역구별 낙선운동 후원회를 조직해
발표할 예정이다. 낙선운동 자체는 합법이지만, 그 구체적 방법은 앞으로
정해지는 법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시민연대 등이 이를 어기면서 보다
강력한 방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차량에 확성기를 달고 집단
시위 형태의 운동을 전개하거나, 낙선 대상자 지역에서 대규모 연설회를
개최하는 방식 등이 있을 수 있다. 당장 시민연대는 전국 버스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이때 마찰은 불가피하다.

어쨌든 시민단체들의 선거운동 파괴력은 상당할 것으로 정치권은 보고
있다. 낙선-낙천운동에 흥분했던 일부 의원들이 태도를 낮춰, 명단에서
빠지기 위한 치열한 물밑 로비에 돌입한 사실도 이를 잘 보여준다.

각 정당이 시민단체가 제시한 '공천 부적격자 리스트'를 공천에 반영할지
여부도 주목된다. 선거기간중 시민단체를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각 당이
'성의'를 보일 가능성이 있어 해당 의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민회의 한화갑 사무총장은 "잘 모르겠다"고 유보적 자세를 취했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시민단체들의 87조 삭제 요구를 들어준 만큼 이들이 내놓은
낙천 리스트가 그냥 휴지통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기자회견을 통해 "공정한 의견개진이라면"이란 전제
아래 "(시민단체의 의견을) 존중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