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한 술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술 시켜 마시면 마시는 족족
자리에서 일일이 값을 치러야 하는지, 아니면 나중에 계산대에서 한꺼번에
치러야 하는지 궁금해서 터키인 급사에게 내가 영어로, 그것도 꽤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술값은 여기에서 지금 치르리까? 아니면 나중에 계산대에서 치르리까?』

급사는 알아먹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터키 술집에서, 외국인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급사는 책임 추궁을 당한다고 했다. 옆에 있던
한국인 교수가, 공부 오래 한 사람이 무슨 영어를 그 따위로 하느냐고
내게 핀잔을 주었다. 발끈했을 수밖에. 비 영어권에서 공부한 당신이
내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어? 그러자 그 교수가 시범을 보여 준다면서
급사를 불러 술을 한 잔 시켰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툭 쳐 보이면서,
『머니(돈)?』하고 물었다. 그러자 급사는 계산대를 가리켰다. 낱말 딱
하나로 이루어진 그 완벽한 의사소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스에서 아르고스라는 도시로 가는 길을 물었다. 현지인들이 현지
말로 설명해 주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외국인을 많이 접촉하는
사람이 나을 것 같아서 주유소를 찾아들어가 「아르고스」를 외쳤다.
주인의 영어는 간명했다.

『아우또반, 뜨리뽈리, 세븐 낄로메떼르, 아르고스, 오께이(트리폴리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7킬로미터만 가면 아르고스 팻말이 나옵니다.
아시겠지요)?』

언어에 관한 한 나는 회색분자다. 우리 국민이 적극적으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흑인지 백인지 어느 한 진영에
가담할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나는 싫다. 말 공부가 바빠서 나는
흑백 논리 사이로 난 회색의 길을 다만 걷고자 한다.

우리에게 사과는 「사과」다. 그런데 사과를 「애플(apple)」이라고
부르는 데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말을 본격적으로 배워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망설였다. 그러다 배우기로 했다. 사과를 「애플」이라고
부르게 되는 순간부터, 「사과」의 세상과는 다른, 또 한 세상과의 만남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한 제 1의 선택이다.

「애플」의 세상은 또 한 세상이 아니라 「온 세상」같다는 느낌에
시달리면서, 나는 「사과」와 「애플」의 세상을 두루 살고자 했다.
내가 처음으로 철자를 왼 단어는 '그림'을 뜻하는 'picture'였다.
응원하면서 '승리'를 뜻하는 victory를 "뷔아이씨티오아르와이"라고
외친 덕에 쉽사리도 ?다. "피아이씨티유아르이" 만세! 처음 읽은
영어책은 '톰 소여의 모험'이었다. 그러면서 고등학생 때 번역에
손을 댔고 지금까지 영어와 벗해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의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효율만 놓고 보자면 「사과」의 세상보다는 「애플」의
세상이 더 효율적일 것 같아 보였다. 애플의 세상으로 나아갈 것인가,
사과의 세상으로 돌아올 것인가? 나는 일단「사과」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내가 한 제 2의 선택이다.

「사과」가 지닌 국지성-특수성을 섬기자면 「애플」이 지닌
세계성-보편성을 포기해야 하는가? 나는 「사과」와 「애플」을
동시에 택했고, 둘 사이 조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애플」의
세계성은 「사과」의 국지성과의 존재론적 화해가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한 제 3의 선택이다.

나는 이제 「왜」의 문제에 휘둘리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다.
바로 이 「어떻게」에서 「애플」의 다양한 질적 층위가 발생한다. 한국
사람 누구나 다 「사과」만큼 「애플」을 잘 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최소한 글 머리에 소개한 그리스, 터키 사람들만큼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하는 고백이지만, 「애플」이 온 세상 시장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는 화폐라는 느낌, 단일 화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애플」의 유통 범위 확장을 경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영토 확장을 경계하는 시선이 있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고추
한 근 들고 나가 소금 한 되 바꿔오던 물물교환 시대는 지났다. 우리가
시대를 그렇게 만들었다. 회색분자인 농부는 집에서는 「사과」를
먹어도, 나갈 때는 「애플」을 싸들고 나간다.

(소설가ㆍ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