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의 지성사는 격변을 거듭해왔다. 그것은 20세기
한국사가 그만큼 격동을 거듭해왔으며, 그런 가운데 새로운
근대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모색도 치열했음을
반영한다.
20세기 전반 한국의 지성들은 19세기말 무너져버린 동양적
사상 체계에 대한 대안을 찾아야만 했다. 그 대안은 물론 서양의
것이었다.
민족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에게 더욱
절실했던 것은 식민지라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안창호 신채호 박은식 등은 민족주의로써 현실에
맞서고자 하였다.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한국의 지성인들은
대부분 그같은 입장에 섰다. 하지만 지원을 기대했던 서구 열강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한국의 민족주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절망한 한국의 지식인들이 새롭게 찾은 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
크게 부각된 공산주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백남운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의 사적 유물론과 유물변증법에 의거하여
현실을 해석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서 계급을 발견하였다.
1929년 세계공황 이후 그들은 세계혁명을 기대했지만 혁명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찾아온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중국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이었다. 전시체제 하에서 일본제국주의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투항을 요구했다. 결국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 많은 지식인들이 투항하였다.
그들은 한국 민족의 문화에 대한 정체성이나 자존감을 갖고 있지 못한
식민지적 지식인이었다. 반면에 안재홍 여운형 등은 끝내 투항을 거부하고
지조를 지켰다.
해방 이후 안재홍 등은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외래
이데올로기에 의해 민족이 양분되는 현실 앞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길로서 신민족주의를 제시했다. 제3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은 이미
1930년대 조소앙에 의해 제시된 삼균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균주의는
1940년대에 들어와 김구가 주도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의 기본
이념이 될 정도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해방 이후 남북분단이
없었다면 삼균주의나 신민족주의 등 중도사상이 한국 지성사의 주류를
이룰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족의 분단과 뒤이은 동족상잔의 전쟁은
'제3의 길'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고 이 땅의 지성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는 처지에 놓였다. 김구같은 민족주의자가
암살되고, 안재홍같은 신민족주의자가 납북된 것은 그러한 한반도의 현실을
상징한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은 1960년대 4·19혁명, 한일협정 반대, 유신반대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 속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소생시켰다. 특히
박정희 정권 하에서 장준하 함석헌 등은 민족자존 민주주의 인권 등이 부의
축적을 위한 경제성장이나 '근대화'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 70, 80년대에 이르러 강만길 백낙청 등은 분단현실이야말로 민족을 옥죄는
근인이라는 각성을 촉구하였다. 또 광주민중항쟁 이후 도래한 질풍노도의
80년대에 민중주의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휩쓸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구 소련의 붕괴 이후 지식인들의 관심은
민주주의의 보편화, 사람다운 삶, 문화적인 삶의 영위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90년대에 몰아닥친 세계화의 바람과 그에 이은 IMF 관리체제,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 등은 한국 민족이 처한 현실이 아직도 매우 엄중하다는 것을
지식인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20세기 내내 한국의 지성들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화두로써 한국사회를 이끌고 왔다. 그리고 21세기를 맞는 이
시점에도 평화적 통일을 통한 분단의 극복, 민주주의의 보편적 실현,
사회경제적 평등의 구현 등은 여전히 한국 지성들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 또
여기에 덧붙여 개인과 공동체, 세계와 한국,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설정 등이 새로운 세기를 맞는 이 땅의 지성들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다. (박찬승·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