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세계 농구계는
동구권 강호들을 제치고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을 2위에 끌어올린 박신자
(당시 26세·1m76·센터)란 선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통상 1위팀에서
MVP가 나오던 관행을 깨고 박신자는 그 자리에 올랐다. 그의 플레이가
얼마나 독보적이었나를 보여준 사건이다. 박신자는 모든 종목을 통틀어
세계대회 첫 MVP가 된 국내선수다.

박신자의 계보는 박찬숙으로 이어진다.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장신

(1m90)에 몸놀림까지 빨랐던 박찬숙은 1975년 콜롬비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참가, 팀(한국)은 5위에 그쳤지만 '미스

월드바스켓'에 뽑히는 영예를 누렸다.

남자농구는 슈터가 명성을 날렸다. 50~60년대 김영기, 60~70년대
신동파, 70~80년대 이충희는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수퍼스타였다.
신동파는 69년 마닐라에서 주최국 필리핀과 붙은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혼자 50점을 넣는 대활약으로 대회 첫 우승의 수훈갑이 됐다.
「슛도사」이충희는 역시 한국이 우승한 87년 이 대회에서 MVP에 올랐고,
국내 농구에서는 가장 먼저 4000득점을 돌파했다. 「농구 천재」 허재,
서장훈, 이상민 등이 스타의 계보를 잇고 있다.

여자배구는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1976년 몬트리올)이란
영광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1m64의 「날으는 작은 새」조혜정(당시
23세)과 세계적인 세터 유경화, 정순옥 변경자 이순복 유정혜로 짜인
한국 낭자군은 단신과 힘의 열세를 정신력으로 메우며 동독, 쿠바,
헝가리 등을 차례로 격파,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적인 거포로 명성을 날린 강만수(현대자동차 감독)도 잊을 수
없다. 강만수는 고교때 국가대표로 뽑혀 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 4강,
78방콕아시안게임 우승, 79유니버시아드 우승의 주역이었다. 강만수의
인기는 장윤창 김호철 이종경 등이 뒤를 이었고, 신진식 김세진 등이
90년대 후반 들어 다소 시들해지고 있는 배구인기를 그나마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