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근 거부투쟁 ##

이후락 비서실장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나섰다.

"여보, 총무처 장관. 내가 아는 외국의 공무원 제도에는 이런 것도
있던데 말이오…."

장관 취임 직후 미국 등 행정선진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석제
장관에게는 턱도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장관이 말문을 막았다.

"여보시오, 이실장.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공무원 제도에 관해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당신보다 전문가요. 지금은 당신이 나설 때가 아니오."

회의실 분위기는 더욱 냉랭해졌다. 정일권 국무총리도 묵묵부답이었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대통령의 만년필 톡 톡 거리는
소리만 회의실을 울렸다. 침묵을 깬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장기영 부총리와 이장관을 격려해주는 말로 분위기를 바꾸더니
장부총리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런 말을 했다.

"장 부총리, 어떻소. 이번엔 한 번 하고 넘어가지?"

장기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대통령의 의중을 따랐다.

뛸 듯이 기뻐한 이석제가 장관실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장기영
부총리야 말로 막판 뒤집기의 명수인데 하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저녁에 정일권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질 않았다. 장기영
부총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청와대로 연락해 자초지종을 캐어보니
청와대 심의 과정에서 장부총리가 "이것도 해야 합니다. 저것도 해야
합니다"하고 물고 늘어져 결국 공무원 처우개선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석제는 장관들에게 공무원들의 생활이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지 않으면 처우개선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겠다는
판단을 했다.

"공무원들이 부패하는 가장 큰 요인은 먹고 살 방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우개선이 당근이라면 사정을 통한 부패 공직자 추방은
채찍입니다. 당근없는 채찍은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이튿날 아침, 이석제는 출근을 하지 않고 장기영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석제는 경제기획원 장관 비서실장을
바꾸라고 한 뒤 비서실장에게 이런 전갈을 남겼다.

"나는 오늘을 기해 내각을 떠날 작정이오. 그런데 내가 떠나는 데는
조건이 있소. 장기영 장관과 함께 떠나겠다는 말이오. 그 이유는
장장관에게 직접 전하겠지만, 내 판단으론 장장관이나 나나 이 정부에
별로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닌 것 같소. 국가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일개 주사라도 떠나는 게 도리이거늘, 하물며 둘씩이나 국고를 축내고
있다는 것은 국가발전에 지장만 초래할 뿐이오. 이 뜻을 분명히 장관에게
전해 주시오."

이석제는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다음날도 출근하지 않았다. 오후에
총리 비서실장이 달려왔다가 이장관의 결심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이날
저녁에는 정일권 총리가 이장관을 불러냈다. 이석제는 장기영 부총리가
없다면 나가겠다고 하여 두 사람만 저녁을 했다. 공무원 처우개선과
관련한 이야기는 일체 없었지만 정총리는 이장관의 확고한 결심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결근 3일째 오후에 정총리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 장관, 내가 부총리를 불러 말썽없이 넘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했소. 그도 양보해서 공무원 처우개선 문제가 해결됐으니 지금
당장 출근하시오."

국무회의는 '공무원 보수 규정중 개정의 안'을 의결, 1966년 1월부터
공무원들의 월급을 30%씩 일괄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별정직 공무원인
대통령의 인상된 봉급은 7만8000원이며 감사원장 5만5000원,
중앙정보부장-대통령비서실장 5만2000원, 국무총리 7만1000원,
국무위원-처장-서울특별시장 4만원. 일반행정직(최하 호봉 기준)
공무원들의 봉급은 1급이 2만8500원, 2급갑 2만2000원, 3급갑 9천500원,
4급갑 7270원, 최하위직인 5급을은 월 5210원을 타게 되었다.

봉급생활자의 가구당 월평균 소득수준이 1만2090원, 노동자 가구가
8770원이고,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이 8850원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1966년에는 공화당 예산조정위원회가 엠버서더 호텔에 방을 얻어 놓고
예산안을 검토하다가 이런 정보를 입수한 이석제 장관이 호텔 방까지
쳐들어 가 공무원 봉급인상분을 예산편성에 상정시키기도 했다.

이석제 총무처 장관은 공무원 처우개선 5개년계획(선발시험제도,
정원제도, 봉급인상, 인사고과 제도, 연금제도 등)을 수립, 장관직을
그만두던 1969년까지 계속 시행했으며 공무원 보수도 전년대비
20∼30%씩 인상해 갔다.

당시 상공부 공업제1국장으로 근무했던 오원철(제2경제수석 역임)의
회고-.

"대졸출신의 하급직 공무원들이 특히 힘들었던 시절입니다. 대학생
가정교사 수입보다 말단 공무원의 월급이 적어 결혼을 하면 생계걱정부터
해야 했습니다. 1966년부터 공무원 임금이 오르기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물가도 그만큼 오르기에 피부에 와 닿을 만큼 느낄 수는 없었다고
기억합니다. 나중에는 보너스도 나오고 매년 좋아진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국영기업체 수준까지는 못갔지만 하급 공무원들은 덕을
봤지요.

그 무렵 부패한 공무원도 많았지만 대다수 공무원들은 자부심과
존엄성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간부들이 업체에 들렀다가 업주가 '식사나
하라'고 준 돈은 반드시 갖고 들어와 해당부서 직원들과 나누어 썼습니다.
이런 돈을 혼자 착복했다가는 직원 사이에 따돌림 당했습니다. 섬유과의
한 간부는 업주가 준 돈다발을 갖고 와 '돈 좀 주던데, 함께 쓰자'며
공중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월급만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면서부터 공무원들의 자존심-자신감도 강해졌습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