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란 말은 권력교체가 제도화되지 않은 비민주국가에서만 통용된다.
2인자란 1인자의 비호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존재지만 권력세계의
생리상 2인자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1인자를 지향하게 되어 있다. 그
순간부터 2인자는 아래로는 시기·질투·모함, 위로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2인자의 실패는 3인자로 강등되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20세기를 돌아보면 우리는 숱한 2인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확인할 수
있다. 히틀러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던 게링(공군사령관)은 제3제국
최후의 날에 스스로 독일제국의 1인자가 되려고 했다가 히틀러로부터
사형집행명령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레닌의 2인자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비롯한 3인자 그룹의 합동공격으로 실각한 후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손에 암살되었다. 모택동의 2인자 유소기는 모를 허수아비로
만들려다가 문화대혁명이란 역공을 당해 비명횡사했다. 이승만의 2인자
이기붕은 아첨배들의 무리에 기인한 민중혁명을 만나 가족과 함께 자결해야
했다.
이처럼 사상률이 매우 높은 2인자란 직종에 수십년간 머물면서 천하대란의
중국을 관리했던 주은래 수상. 필자가 그를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2인자'로 꼽는 이유는 한 1인자(모택동)의 결정적 단점을 보완하면서
자신의 경륜을 실천해줄 다른 1인자(등소평)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
그의 성공비결은 1인자가 되려는 야망을 일찍감치 포기하고 마음을 비운
점이다. 공산혁명의 투쟁경력에서 모택동보다 앞섰던 그는 1930년대에 모의
군사적 천재성과 엄청난 파괴력을 인정하자마자 2인자의 역할을 자원했다.
그 뒤 40년간 그는 1인자의 변덕과 광기로부터 인민과 인재들을 보호함으로써
다음 시대를 여는, '험한 세상의 격류 위에 걸린 다리'의 역할에 진력했다.
증오의 열정이 살육의 피바람을 부르는 혁명의 시대에서도 해학과 균형감각,
그리고 교양을 잃지 않았던 그는 타협과 온건, 그리고 실사구시의 실용정신을
유지하였다.
주은래에게 어느 서방 기자가 "중국에도 창녀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주은래의 대답은 간단했다.
"있습니다. 대만에"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 그리고 대만의 부패상을 한 마디로 압축한
재치. 냉전시대 세계의 역학관계를 바꾸어놓은 미중수교 작업 때 주은래의
상대자였던 닉슨은 회고록에서 그를 극찬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과
성실함을 잃지 않는 공인으로서의 자세에 감동했다는 것이다.
제갈공명의 생애에서 우리가 감동하는 부분은 그의 업적(결과로 따진다면
그는 실패한 전략가였다)이 아니라 지성의 자세이다. 주은래는 제갈공명의
덕성을 갖추었고 등소평을 통해서 자신의 꿈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공명보다도
더 성공적인 2인자였다.
모택동의 주치의였던 이지수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에는 모택동에 대한
주은래의 굴욕적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주은래는 모택동에게 보고할
때는 침상 옆에 꿇어앉아서 했고 방광암 수술을 받고싶어도 모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2년간 고생했다는 것이다. 1974년 6월 주은래의 아내 등영초는
모택동 전담 치료의사단에 속한 여성 검사원에게 부탁하여 모주석으로부터
수술허가를 겨우 얻어냈다.
1973년의 경우 주은래는 72일간을 병상에서 보냈다. 병상에서도 비서들을
매일 불러 집무를 계속했다. 퇴원 후에는 하루 평균 16-18시간씩 일하면서
병신을 혹사했다. 그는 걱정하는 측근들에게 "나처럼 역사의 무대에 내던져진
인간의 몸은 사물이 아니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2인자로서 주은래의 가장 값진 시간은 그가 암을 품고 초읽기식의 치열한
생을 이어가던 1972∼ 76년 사이였다. 그는 미국·일본과의 수교작업,
월남전의 마무리, 문화대혁명의 폐허 속에서 국가경제를 재건하는 문제,
그리고 모의 사후에 대비한 권력의 재편성(추방당한 등소평의 재기용과 문혁
4인방의 거세준비 작업)과 국가노선을 개방·실용쪽으로 전환하는 과제에
몰두하였다.
등소평은 주은래의 장례식에서 "그는 소박·신중·겸손하고 사람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솔선수범했고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다. 주은래가
진정으로 충성을 바친 대상은 모택동이 아니라 인민과 국가였다. 주은래는
당대의 권력사에선 2인자였지만 인민들의 마음, 그리고 후세의
평가에선 1인자란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이는 네 왕을 모시면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주도했던 2인자 김유신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민족사 제1의
인물'로 대우했던 점과 상통한다. (조갑제 월간조선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