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데이, 레드 데이, 로즈 데이, 레터 데이, 뮤직데이….
요즘 청소년들 머릿 속 달력은 각종 '…데이(day)'로 빽빽하다. 실제
달력 어디를 뒤져도 없는 아이들만의 기념일이다. 특정 '데이'는 특정
선물을 주고 받는 날. 청소년들은 왜 각종 기념일에 열광할까. 단순히
상술에 놀아난다고만 보기엔 청소년층 반응이 너무 뜨겁다.
지난 11일.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일제히 젓가락처럼 기다란 과자
'빼빼로'를 주고 받았다. 제과점이나 선물가게에서는 한 갑에 300원짜리
빼빼로를 예쁘게 포장한 수천원대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빼빼로
데이라며 졸라대는 초등학생 아들 성화에 못 이겨 10일 과자를 사러나선
주부 박모씨(40)는 대형 할인점에 빼빼로가 단 한 갑도 남아있지 않는 걸
보고 경악했다.
왜 하필 11월11일? 1이 네번 겹치며 작대기가 4개를 이루는 이날,
청소년들은 '키 크자', '살빼자'며 빼빼로를 나눠먹고 우정을 확인하거나
애정을 고백한다. 선물용품업체 아트박스 압구정점 김인수 점장은 "빼빼로
데이 특수를 예상해 '왕빼로' 10박스를 미리 들여놨는데 순식간에 다
나가버렸다"며 "정작 '빼빼로 데이'에는 없어서 못 팔았을 정도"라고
말했다. 롯데 제과는 월평균 매출이17억원 정도였던 빼빼로가 11월 들어
하루 1억5000만원어치씩 팔렸다고 밝혔다. 회사측은 "5년전쯤, 일부 지방
여중생들이 날씬해지자며 11월11일 빼빼로를 돌리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듣고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빼빼로 데이 보단 덜 유명하지만 새우깡 데이, 에이스 데이, 미니쉘 데이,
죠리퐁 데이도 있다. 각종 '데이'의 원조는 발렌타인 데이(2월 14일). 이어
화이트 데이, 블랙데이 등 유사 데이가 자리 잡았다. 키스 데이, 링 데이,
뮤직 데이, 100일 데이, 인형 데이, 선물데이…. 1년에 수십개씩 난무하는
각종 기념일 날짜는 학교, 지역마다 제각각이다. 지난 14일, 교보문고 선물
코너에서 열심히 '쿠키 데이' 선물을 고르던 김보미(16)양은 "왜 오늘이
쿠키 데이냐"고 묻자 "모른다. 그러면 왜 발렌타인 데이가 2월 14일이냐"고
되물었다.
"반 전체가 빼빼로를 나눠 먹었어요. 다들'빼빼로 데이'라고 난린데…
저도 예의상 먹어줬지요.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있는 학생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만든 날 같아요."(주재욱군·고2)
"빼빼로 데이에는 학교 매점에서도 특별히 빼빼로를 팔아요. 물론
그많은 데이를 다 지킬 순 없구요. 레터 데이, 로즈 데이 등 서너가지만
골라 지켜요. 무슨 날이 무슨 날인지 다 외우지는 못하는데, 학교 옆
팬시점에서 날짜에 맞게 선물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알려줘요. 다달이
각종 데이가 많아 재미있어요. 돈이 많이 들어서 문제지요."(박화영양·고1)
"빼빼로 데이 전날 밤, 엄마랑 빼빼로를 2개씩 리본으로 묶어 포장했어요.
친구들이 며칠전부터 '나 꼭 줘야 돼'라고 부탁해 부담스러웠어요. 친구에게
받은 빼빼로를 다른 친구에게 주기도 했어요. 나 혼자 안 하면 이상하쟎요.
빼빼로 데이 다음날은 빼빼로 못 받은 애들을 위한 '칸쵸(과자 이름)'
데이였어요."(조은현양·중2)
청소년 사이 퍼진 별별 '데이'도 고도의 상술이 불을 지핀 현상. 그러나
동시에 청소년의 불안심리가 반영된 거울이다. 성적, 대학 진학, 외모,
이성…. 모두 청소년의 어깨를 짓누르는 성장기의 화두들이다. 불안감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또래 유행에 집착하는 청소년들과 뭐든지 `건 수'를
만들어 나서는 상술의 절묘한 결합이다. 몇해 전 일부 사회 단체에서는
"발렌타인 데이 대신 대보름날 부럼이나 떡을 돌리자"고 나섰지만
청소년들의 싸늘한 외면을 받았다. 우리 것이 생경하도록 외래문화에
젖은 탓도 있지만 어른들이 슬쩍이라도 의도성을 걸치면 청소년들은
'촌스럽다'고 돌아선다.
한국 청소년문화연구소 천화연 연구원은 "아이들이 답답한 현실을 잊기
위해 특정 날짜에 함께 자장면이나 빼빼로를 먹으며 잠깐씩 해방감을
즐긴다"고 설명한다. 최대의 공포인 대학입시를 앞두고 학생들은 휴지
(잘 풀어라), 도끼-카메라 엿(잘 찍어라), 돋보기-거울(시험 잘 봐라) 등
기발한 '수능 상품'을 사며 짧은 순간이나마 즐거워 한다. 경기도 안산시
원일중학교 송은미 교사는 "학생들이 하루 날을 잡아 특정한 상대와 뭔가를
주고 받는 행위에 크게 집착한다"고 말한다.
"요즘 학생들은 이성 친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 비디오 언약식이란 걸
찍기도 해요. 그러나 무슨 무슨 데이가 돌아올 때 마다 선물을 못 받은
학생은 소외감을 느끼면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지요."
발렌타인 데이, 로즈 데이, 레터 데이, 인형 데이….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못지 않게 손꼽아 기다려지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준비를 서두른다. 다들
챙기니 나만 빠질 수도 없고… . 시험보다 자주 돌아오는 각종 기념일에
맞춰 가지각색 선물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하고, 못 받으면 속상해 풀이 죽는
청소년들. 요즘 교실안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