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년 추계 컴덱스쇼 현장에서...


안녕하십니까. 저는 사장실에 근무하는 우병현기자입니다. IT클럽에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저는 지금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리고
있는 '99년 추계 컴덱스쇼 현장에 와 있습니다.

현지 언론들이 '테크로 밀레니엄'을 알리는 행사라며 흥분하고
있는 이곳에서 인터넷 혁명을 이끌고 있는 첨단기술 동향을 잘 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얻는 또하나의 즐거움은 세계 정보통신업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거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점입니다.

개막전 행사에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를 비롯하여, 소프트뱅크
손정의회장, 휴렛패커드 칼리 피요리나회장 등 정보통신업계의 유명
CEO들이 대부분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는 개막전 행사장의
귀빈석에서 인파에 묻혀 있는 손정의 회장을 발견하고, 무조건
악수부터 청했습니다. 제가 "한국의 조선일보 기자"라고
소개했더니, 손회장은 활짝 웃으며 악수요청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좀 달라"며 내민 수첩에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적어주었습니다.

기습 인터뷰는 밀려드는 인파에 순식간에 끝났지만, 저는
의기양양하게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컴덱스의 주인부터 처음
만났으니, 앞으로 행운이 터지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쇼에서 최고 관심을 끈 인물은 손정의회장이 아니라, 빌
게이츠회장과 리눅스의 최초 개발자 리누스 토발즈씨였습니다.(또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대한 공격적인 언행으로 관심을 끈
썬마이크로시스템즈사의 스콧 맥닐리회장도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에 얽힌 일화는 별도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관자들은 대부분은 행사내내 게이츠회장과 토발즈씨를, 그리고
윈도와 리눅스를 비교하길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절대
강자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묘한 본성이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 극적인 것은 이번 행사를 앞두고 미 법원이 MS사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고 예비판정을 내림으로써 게이츠가 창사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점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토발즈는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떠오르는 영웅'으로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컴덱스쇼의 화려한 개막을 알리는 첫 기조연설은 역시 빌 게이츠의
무대였습니다. 그는 초호화 호텔인 베네시안호텔에 마련된
연설회장에서 등단하자 마자, "좋은 변호사 없느냐"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습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을 심각하게 표출하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게이츠는 미리 준비한 영상물을 상영하거나, 연설도중에 보조
출연자들을 등장시키는 등 치밀하게 준비된 연설을 1시간 10분여에
걸쳐 연출했습니다. 또 자신이 영화 '오스틴 파워'의 주연 복장을
입고 출연, 참석자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하기도 했습니다.
대중연설이라기 보다 한편의 퍼포먼스에 가까웠습니다. 많은 돈이
투입됐다는 느낌도 강하게 줬습니다.

게이츠보다 하루 늦게 같은 장소에서 기조연설에 나선 토발즈씨도
역시 노타이와 안경 차림이었습니다. 다만 게이츠는 셔츠위에 목없는
스웨터를 입었고, 토발즈씨는 셔츠상태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노타이 차림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토발즈씨에게서
20년전의 게이츠의 젊은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실제 토발즈씨는
게이츠처럼 대학생 시절에 리눅스를 처음 설계, 오늘날의 리눅스
열풍을 일궈냈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중퇴하고 회사를 차렸던 게이츠가 20여년만에 세계
최고의 부를 쌓았고, 토발즈는 트랜메타라는 한 벤처회사의 직원에
불과한 점에서 두 사람의 신분은 하늘과 땅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사람의 부의 차이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평가받습니다. 즉, MS-DOS와 윈도는 유료이고, 리눅스는
무료가 원칙입니다.

참관자들은 컴덱스에서 두사람의 대 격돌을 예견했지만, 실제 격돌은
없었습니다. 게이츠는 리눅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MS의 공격자들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했던 점에 비하면 다소
의외였습니다.

토발즈씨 역시 게이츠나 MS사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MS가
리눅스배포사가 되려하면 어떻게 대처하겠느냐"는 질문에,
"가능하다. 또한 합법적이며, 나는 그렇게 하도록 권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It's not about Linux
versus Microsoft. Let's just do something we have fun with and that we really
really care about."(느낌을 살릴 수 있도록 원문을 그대로 전합니다.)

세계 정보통신업계의 부침사를 보면 영원한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확실한 듯합니다. 그러나 MS사와 게이츠는 여전히
강합니다. 절대강자 게이츠가 새로운 도전자인 토발즈를 어떻게
수성할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빌 게이츠의 영역과
부딪히지 않으면서 자신의 사이버왕국을 건설하고 있는
손정의회장의 '신 손자병법'도 기대를 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