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문화가 빠르게 현실 속으로 침투하면서 전통적 의미의 사회
기초 공간들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사이버 공간에서는 예식장과 장묘
공간 등을 제공해 현실 공간의 보루처럼 여겨져 온 혈연 공동체의 장마저
비신체적 접촉의 장으로 바꾸고, 더 나아가 DNA를 판매함으로써 생물학적
사건마저 디지털의 장으로 변화시키려는 야침 찬 기획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 기획들을 한 때의 해프닝으로 보기 힘든 것은, 인터넷 뱅킹이나
사이버 박물관 등이 보여주듯이, 이미 우리가 디지털 공간과 현실 공간의
잡종 교배를 통해 창출된 새로운 사회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혼, 장례, 임신, 출산과 같은 혈연적, 생물학적 사건들을
디지털화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시도이며, 남은 문제는 이러한 잡종의
공간에서 살아갈 윤리적 생물학적 감수성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뿐이다. 전통적 지식에 따르면,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커다란 윤리적
사건은 어른이 되는 것(관),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혼), 친인의 죽음을
치르는 것(상), 조상을 기리는 것(제)으로 나누어진다. 이는 생로병사의
생물학적 사건과 어우러지면서 한 사람의 삶을 빼곡하고 촘촘하게 감싼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장들은 한 사람의 종적, 횡적 관계들의 그물코가
되고, 그의 사람됨을 결정하는 것은 예에 맞게 이를 잘 치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에 맞으려면 법을 이해해야 하고, 법을 이해하려면 성현의 말을
알아야 하고, 성현의 말을 알려면 문자를 해독할 수 있어야 했다.「한자는
어떻게 중국을 지배했는가」에서 김근 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이렇게 해서
문자의 해독 능력을 기초로 하나의 사회가 계층화되었던 것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의 감수성은 문자를 기초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러한 감수성이 디지털 문화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머지 않아 디지털 공간에서 살아갈 것이다. 최근 「디지털을
다루는 능력」을 뜻하는 디제라시(digeracy)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있다.
과거의 사회에서는 문자를 다루는 능력(literacy)이 사람됨의 첫째
기준이었다면, 지금부터의 사회에서는 디제라시가 사람됨을 가르는 첫째
기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디지털을 사는 감수성을 기르는 것,
디지털 공간에 맞는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이버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장은수·문화평론가·「황금가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