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중심 이성주의의 종말 선언 ##

20세기는 인류사에서 문제가 가장 많았던 한 세기다. 문제가 많았던
시대에는 그 문제를 갖고 씨름을 했던 사상가도 많은 법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통크게 를 펼친 사상가는 단연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이다. 2,500년의 서양 철학사에 종말을 선언하며 새로운
세기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선포했으니.

왜 서양 형이상학은 종말에 와 있는가? 이성 중심이고 존재자 중심이고
인간 중심이기 때문이다. 서양 사유의 태동기에 인간의 사유능력에는 흔히
표상적 사유라 불리는 뿐 아니라 존재〔있음〕의 의미를
읽어내는 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존재하는 것
전체에 대한 인간의 대응능력으로서 만이
전면에 부각되고 시와 신화가 그늘에 가려지면서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 왜곡, 존재 축소, 존재 망각의 길로 들어섰다. 이러한 로고스(이성)
중심적인 형이상학은 그 로고스의 만개를 현대의 기술과 과학에서 본다.
기술화되고 과학화되고 산업화되고 정보화된 현대에서 형이상학은
된 셈이다.

서양 형이상학은 인간이 눈앞에 세울〔표상할〕 수 있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식의 시각에서는 의 의미도 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눈앞에 세울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유할 수도, 경험할 수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다. 철학/학문/과학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만

다룰 뿐,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무에는 관심도 없고 관심을 가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없는 것을 다룬단 말인가? 존재는

무는 . 이보다 자명한 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과 에 대해 한번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 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하고. 과연 인간이

사유할 수 없으면, 경험할 수 없으면, 말로 잡을 수 없으면, 눈앞에 세울

수 없으면 없는 것〔무〕인가? 그것은 너무 인간 중심적인 태도가 아닌가

하고.

"철학은 향수요 어디에서나 고향을 만들려는 충동"(노발리스)이라고
하듯이 인간은 낯선 것을 자기것으로 만들어 놓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는
존재다. 서양형이상학의 보편적인 철학함에는 이렇듯 인간의 도구적 지배의
의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현전(그
자리에 있음)의 의미로 파악하여 눈앞에 있는 것으로 앞에 세워 놓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반복 가능한 것으로 재구성하고 생산
가능한 것으로 체계화하여 언제나 필요에 따라 사용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인간의 소유, 지배, 소비의 욕망구조가 깔려 있다.

형이상학은 오직 인간에게서만 일어나는
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자 전체에로 향한
이며 그러한 시각 아래에서 아무 의심 없이 전제되고 있는
이다. 눈앞에 세울 수 있는 것만을 존재자로 보고 그 근거를
묻고 원인을 찾으며 설명과 해석, 지배와 조작에 관심을 두는 는 그러한 존재의 을 읽어낼 수 없다. 형이상학의 종말을 맞아
혹은 종말을 위해 사유가 해야 할 일은, 이성 중심, 현전 중심, 인간
중심의 사유태도에서 벗어나 과 을 넓히는
일이다. 없는 것으로 내쫓은 무/공/허를 존재의 마당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것들에게 새로운 만남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일이 새천년에 사유가
해야 할 과제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인문대학장)


독일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 박사.
저서: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존재의 바람, 사람의 길》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