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8년말 미국 내셔널 기자클럽 연설에서 워싱턴 포스트지의
대표적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로더는「정치인과 기자 사이의 선이
흐려지는 위험성」을 경고했다. 「워싱턴에서 기자가 밀실 전략가로,
일시적인 임명직 공무원으로 둔갑하면서 기자-정치인 관계가 갈수록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하는 발언이었다. 그는 정부에 대한 건전한
견제 기능이 있기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수정헌법 1조)를 지키려면
『언론인 스스로, 정치인-홍보전략가-기자들이 쉽사리 교체 가능한
워싱턴내 도당(clique)의 일원이 되지 않도록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 정가에서 정치인과 언론인간의「위험한 관계」는 특히 행정부가

바뀔 때 많이 노출된다. 대표적 케이스는 지금도 미국내 최고

칼럼니스트 중 한 명인 조지 F 윌과 레이건과의 관계. 80년 10월의

카터-레이건 대선 TV토론때 그는 현재 개혁당 대선 후보로 꼽히는 당시

언론인 패트릭 부캐넌과 함께, 레이건의 TV토론 기술을 지도했다. 그는

레이건과 평소 집을 왕래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 토론 뒤에는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TV에 나와 레이건의 우세를 평했다. 그는 또

이때 레이건측이 비밀리에 입수한(후에 드러난 사실) 카터 진영의

토론준비 「브리핑 북」을 보고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윌은 당시

『정치 뒷무대의 일을 볼 수 있었던 귀중한 기회였다』고 했지만,

『평론을 통해 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과 은밀한 조언가로 활동하는 것은

다르다』(워싱턴 포스트·83년 7월17일)는 비난을 샀다.

클린턴 주변에도 「친한 정도」가 「선」을 넘어선 언론인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뉴요커지의 워싱턴 지국장이었던 시드니 블루멘탈. 그는
97년 8월 백악관 참모로 직업을 바꾸기 훨씬 전부터 동료들로부터
「비협조적인 언론 취급 방식」 등 다양한 언론 전략을 클린턴 부부에게
제공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93년말 TV에서 클린턴의 성추문들을
「소수의 극우집단의 음모」라고 일축했고, 힐러리는 98년 1월 바로 이
「우파 음모설」을 주장했다. 그는 계속해서 클린턴의 각종 스캔들에
대해 취재하기를 거부했고, 대통령의 반대파를 겨냥하는 글만을 게재하다가
경질됐다. 후임자인 마이클 켈리의 주장은 『그는 두 주인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

92년 대선 당시 신디케이트 칼럼니스트인 에드윈 요더와 스트로브
탤보트 타임지 워싱턴지국장(현 국무부 부장관)도 「클린턴 언론인」의
일부. 요더는 대선때 클린턴의 베트남전 징집 회피를 부인하는 글을
썼고, 클린턴과 함께 로즈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같은 방을
쓴 탤보트 역시 92년 봄 대선기간중 같은 취지의 2쪽짜리 칼럼을 타임에
게재했다. 탤보트의 아내는 줄곧 힐러리와 함께 대선 유세를 따라다녔다.

이같은 「직분 혼동」과 더불어, 미 언론이 우려하는 것은 언론인이
특정 정치가를 따라 정부에 잠시 몸담았다가 다시 언론에 복귀하는
「회전문」 현상. 대표적인 인물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
기자 출신으로 93년 백악관 홍보책임자로 들어선 데이비드 거겐. 그는
공화당 정부인 닉슨-레이건을 도와 백악관에서 일했지만, 클린턴 때는
민주당으로 바꿨다.

이들은 「언론은 가치 중립적일 수 없다」 「쓰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직분 혼동」에 대한 브로더의 생각은 다르다.
『미 전역의 편집국에선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되짚어보라 요구한다. 언론인들은 자신의 생각도 끊임없이 의심하도록
훈련 받는다. 정부 부처에선 「포장」이 중요하지, 자신의 전제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공익을 위해,

이 둘은 결코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