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1번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신사동과 압구정동
일부를 포함하는 이 지역이 요즘 `퓨전식당'으로 시끌벅적하다.
조금 과장해 말하면 한집 건너 하나씩, 하룻밤 자고 나면
하나씩 생겨난다는 `퓨전식당'은 동서양 재료와 조리법이
`융합'한 음식을 낸다. 미술작품으로 멋을 낸 식당에선
새침한 얼굴로 참기름장 끼얹은 샐러드나 된장에 버무린
닭고기를 마주한 젊은 멋쟁이들을 만날 수 있다.
퓨전식당은 단순히 음식을 파는 상업적 공간이거나 소수
식도락가를 위한 장소라는 물리적 범주를 넘어, `왜 지금 여기에
이토록?'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질문한다. 퓨전음식들은 서구
문명이 지배해온 20세기를 마감하는 오늘, 지구촌 변방 서울서
어떤 의미일까. 5년전 `고추장 바른 거위 간 요리'로 호주
아시아요리대회에 출전한 프랑스 요리사 이병우(롯데호텔)씨와
식문화연구가 한복진 교수(한림전문대·전통조리)가 청담동
한 퓨전식당에서 몇가지 음식을 들며 1999년 서울의 퓨전붐을
이야기했다.
▲한복진 =사실 모든 음식은 퓨전이지요. 지금이야 한국음식
어디에나 고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만,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끝나고도 한참 뒤거든요. 구절판 신선로도
청나라에서 들어온 당대 퓨전음식이고요. 사람이 교류하면 문화,
음식은 당연히 함께 다니는 거지요. 문제는 서울의 퓨전음식이
과연 우리 음식과 외국 음식을 제대로 이해한 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가예요.
▲이병우 =퓨전음식은 동서양이 자연스럽게 만난 태평양
연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동양계 이민이 많은 미국 캘리포니아나
영국 식민지 경험을 지닌 홍콩, 싱가포르가 대표적입니다.
퓨전을 잘하려면 양쪽 문화를 잘 알아야하는데,`퓨전' 자체를
수입해 들여온 서울의 퓨전 붐이 저는 좀 불안합니다.
(두사람은 이탈리아풍으로 꾸민 실내, 만화처럼 재치있는
제목을 붙인 메뉴를 해독하는 데 10분 가까이 걸렸다. 결국
쇠고기구이와 된장국, 연어와 표고를 넣은 밥을 각각 주문했다.
1인당 2만원을 훌쩍 넘긴다)
▲한복진 =실내 디자인이나 상차림에는 잔뜩 멋을 부렸지만
정작 음식은 제대로 `요리성'을 갖춘 게 드물어 아쉽습니다.
음식 값이 아니라 인테리어 값 내는 기분이 들 때가 많지요.
음식점이 `아, 그거 먹으러 다시 가고싶다' , 이런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실패지요.
▲이병우 =왜 청담동에 퓨전식당이 몰려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음식은 패션하고 똑같아서, 유행을
창조하고 선도해나가는 층이 분명해요. 일본 초밥이
뉴욕과 파리에서 고급 음식으로 자리잡은 게 좋은 예지요.
뭔가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강한
청담동에서 세계적 현상인 퓨전음식도 무리없이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세계 대도시에서는 이제 음식재료나 그릇 사용에서
국가간 경계가 거의 무너지고 있어요.
▲한복진 =퓨전이 얼마나 자연스런 현상인지는 한-중-일
3국의 식문화 흐름만 봐도 알게됩니다. 중국은 회를 안먹고
일본은 생선회만 먹는데 비해 한국은 육회와 생선회를 모두
다 좋아했거든요. 그러던 것이 요즘 세나라 교류가 엄청나게
많아지면서 음식도 변해요. 일본의 한국식 불고기집에선
`유케'라고 발음하게 써놓은 육회가 엄청 인기고 홍콩,
상하이에는 중국식 생선회가 나타났어요.
(식사를 마친 두사람은 다소 상기됐다. 음식이 기대에 못미쳤는지,
조금 열을 받은 것 같았다. 한복진씨는 '과연 이런 무국적
퓨전음식들이 우리 식문화 발전에 무슨 기여를 할까' 물었다.
이병우씨는 `조리사들이 책임감을 가져야한다' 고 동의했다)
▲이병우 =올해로 조리사 21년인데, 저는 프랑스요리를
한지 15년 넘어서야 퓨전을 실천해볼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양상치라 해도 프랑스와 여기가 다르고, 양송이
맛도 다릅니다. 결국 한국 실정에 맞는 변용이 필요하더군요.
처음 시도해본게 김치입니다. 스테이크 곁들이로 독일식
양배추 절이 사워크라우트를 내던 것을 김치로 바꿔봤지요.
물로 씻어서 살짝 볶았더니 반응이 좋았어요.
▲한복진 =김치는 그 향과 맛만으로도 세계적 음식재료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런던 어느 식당은 전혀 한국사람과
관계가 없는 곳인데 김치를 넣은 양다리구이를 내놓더군요.
그만큼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하고있다는 증거이지요. 조선
중기에 고추가 들어와서 김치 제조법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는데
지금 청담동 퓨전음식은 서구에서 `개발'한 메뉴를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들 뿐이예요. 한국 음식의 맛과 멋을 살릴 서울발
퓨전요리가 이제 제대로 좀 나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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