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제법 차가운 18일. '수퍼 땅콩' 김미현(22·한별텔레콤)이
이규태(66) 조선일보 논설고문을 만났다. 가장 한국적인 모습으로
세계정상으로 우뚝선 여자골퍼와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글로 표현하는
논객.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데뷔 첫 해 2승을 올리며 일찌감치 신인왕을
확정한 김미현은 청색 모자와 코트(?)로 멋을 내고 '노신사'와 만났다.
김미현은 쉴 새 없는 투어생활을 잠시 접고 바다낚시로 모처럼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표정은 한결 생기가 넘쳤다.이규태 논설고문은 "옷이 아주
멋지다"며 "어디서 그렇게 멋진 코트를 샀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김미현=이거요? 호주에서 산 건데요. 사실은 그 사람들 가디건이래요.
그런데 제가 입었더니 코트가 돼버렸어요.
이규태=사람들이 '땅콩'이라고 하길래 어느 정도일까 궁금했는데, 정말
귀여운 소녀같네요. 옷도 참 잘 어울려요. 그런 걸 힙합 패션이라고 하지요?
김=사실 저도 예전에는 부모님께 혼 많이 났어요. "왜 온동네 걸레질을
하고 다니냐"시면서 옷도 많이 자르셨죠. 한창 반항기때는 "그렇게 자를
거면 왜 나를 작게 낳아주셨냐"고 대든 적도 있어요.
이=일부러 큰 옷을 사 입나요?
김=아니요. 똑같은 사이즈인데도 제게 입으면 길거든요. 그리고 그동안
옷은 별로 사지 못했어요. 이제 후원사인 한별텔레콤에서 지원해주시기
때문에 그동안 '찍어놓았던' 옷을 사고 있어요.
이=힙합패션을 좋아한다니 신세대군요. 그럼 음악도 그 에치오티(H.O.T)인가
하는 그룹을 좋아하겠군요.
김=에이. 저도 그보다는 「어른」이예요. 음악은 386쪽이예요. 이문세
오빠노래가 좋아요.
이=가뜩이나 작은데다 얼굴마저 어려보여 애먹은 적이 제법 있겠네요.
김=이번에 우승한 베시킹클래식때였죠.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엄마와 함께
락커룸으로 뛰어갔죠. 그런데 그 구역을 담당한 자원봉사자가 "여기는
선수들만 들어오는 구역"이라며 엄마한테 "얘는 내가 화장실에 데려갈테니
걱정말라"며 제 손을 꼭 잡고 들어가지 뭐예요.
이=작아서 불리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김=어려서부터 체격에 비해 거리는 많이 나갔어요. 그런데 예뻐 지려고
살을 조금 빼니깐 거리가 줄어요. 그래서 다시 체중을 불렸죠. 물론
필요없는(?) 살은 빼구요.
이=스윙할 때 몸이 엄청 꼬이던데 그게 바로 거리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서
인가요?
김=어휴, 저도 제 스윙이 그렇게 많이 꼬이는 줄 몰랐어요. 얼마전에 한
잡지에서 제 스윙 분석한다고 찍어준 백스윙 사진을 보고 저는 피니시
사진인줄 알았죠. 제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니.
이=그래도 그 스윙으로 세계를 정복했잖아요.
김=참, 요즘은 미국에서도 제 스윙에 부쩍 관심을 보여요. 한마디로 '연구
대상'이라는 거예요. 백스윙이 크지만 내려오는 동작이 정확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요. '여자 존 댈리'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이=맞아요. 골프가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박세리선수를 포함해 한국
여성들이 골프를 잘치는 것은 장장근이라는 손목쪽 근육의 발달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어요.벼농사를 짓고, 나물을 다듬고 바느질을 하면서 한국여인들의
손재간, 손감각이 발달한 거예요.
김= 네. 정말 그렇겠네요.
이= 땅콩이라는 별명이 마음에 드나요?
김=마음에 들어요. 미국에선 한때 '마이티 미니'라고도 불렀는데, 요즘은
'수퍼 피넛'(Super Peanut)이라고 더 많이 알려졌어요.
이=요즘 보니까 '독한 땅콩'이라고도 하던데. 독한 땅콩먹고 탈나면
어쩌려고?
김=제가 프로1년차 때 한국여자오픈 우승을 했을 때였어요. 둘째날부터
속이 안 좋아서 체한 줄 알고 밥도 안먹고 경기에 나갔죠. 결국 우승은
했는데,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맹장염이라고 해서 곧바로 수술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독하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하지만 저도 사실은
부드러운 여자인데 . 하지만 동양여자들이 기본적으로 독한 것 같아요.
오늘(18일) 끝난 AFLAC챔피언스대회에서도 후쿠시마 아키코가 역전 우승한
것 보세요.
이=부드러운 여자라면 남자친구도 물론 있겠지요?
김=골프를 하다보면 여러사람을 만나게 되지요. 하지만 아직은 골프에 더
매달리고 싶어요.
이=지금 나이는 20대 초반인데, 인생 설계를 해 봤나요?
김= 결혼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늦게 할 것 같아요. 우선
좋은 성적을 많이 내야지요. 저는 가정적으로도 성공하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제 부모님이나 시부모님 모두 다 잘 모실거예요.
이=이번에 바다낚시를 갔던데 낚시할 때 손맛이 골프 칠때 손맛하고
비슷하잖아요?
김=정말 그래요. 그 감이 참 좋죠. 참, 고문님께서는 골프를 치시나요?
이=내가 올해 만으로 예순여섯이예요. 남들은 치던 골프도 그만둘
나이인데 작년에야 처음 골프를 시작했어요. 체력엔 자신이 있는데 거리가
너무 안 나는 것 같아 고민이예요.
김=골퍼에게 '거리'는 영원한 숙제인 것 같아요. 그럼 100(골프스코어)은
깨셨어요?
이=재미있는 얘기 해줄까요? 내가 운동신경이 영 말이 아니거든. 또
늦게 시작했고. 내가 100을 깨면 "목을 내놓겠다"는 사람들이 몇 있어요.
느즈막에 사람을 해할 수 없어서 100을 안 깨고 있어요.
김=재밌는 기억은 없으신가요?
이=필드 나간지 두 달만에 곤지암CC에서 홀인원을 했어요. 아무 생각없이
쳤는데 데굴데굴 구르더니 구멍에 쏙 들어갔어요.
김=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는 골프 시작한 지 11년만에 올해 처음
홀인원을 했는데요.
이=사실은 지난 주에도 안양CC에서 '멀리건 홀인원'을 했어요. 첫 티샷이
물에 빠졌는데 동반자들이 하나 더 치라고 하더군요. 연못앞 돌에 튕긴 볼이
그린에 올라가서 그대로 컵에 들어갔어요. 그건 홀인원이 아니고 그냥 파라고
하데요.
김= 어휴, 점점 더 기를 죽이시네요.
이= 나는 골프를 치면서 참 인생을 많이 느껴요. 왜 '힘 빼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실력없는 초보자나 나쁜 버릇이 든 골퍼들이 힘을 못 빼요.
인생도 그래요. 실력도 없고, 권력도 없고,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
척할 때 힘이 들어가는 거예요.
김=저도 그런 걸 많이 느껴요. 저도 사실은 유복한 환경에서 골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하셨죠.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냉정하게 돌아설 때 그 눈빛을 잊을 수 가
없어요. 다행히 친척분들이 참 잘 해주셨어요. 저를 친딸, 친형제처럼
아껴주셨죠. 너무 감사해요.
이=미국서 생활하는데 음식때문에 고생하지는 않나요?
김=전 쌀밥에 밑반찬, 된장찌개 체질이거든요. 이틀에 한번은 먹어야
힘이 솟아요. 계란은 가능하면 안 먹어요. 계란 먹으면 꼭 화장실을
가야하는데, 경기중에 갈 수는 없거든요.
이=팬들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다는데.
김=제가 어려보이고 작으니까 신기한가 봐요. 또 제가 영어가 안되니까
눈마주치면 그냥 웃음으로 때우거든요. 그게 오히려 더 좋은 효과가
있었나봐요.
이=이번 대회 우승후 인터뷰에서 추격하던 상대선수의 마지막 버디 퍼팅이
안들어가길 바랐다고 했는데, 후회되지 않아요?
김=아니예요. 정말 바랐는데 어떻게해요. 100명을 잡고 물어봐도 저랑
같은 심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참 시상식에서 소감을 우리말로 하던데.
김=영어를 제대로 못하는데 잘못된 영어를 하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미리 양해를 구했어요. 대신 1년뒤에는 정확히 배운 영어로 하겠다고 했죠.
이=그래요.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은 참 중요해요. 이제 김미현선수는
세계속에 한국을 심는 외교관이지요. 지금처럼 겸허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김=고문님께서도 칼럼을 더 오래 쓰셔야지요. 그리고 가끔 골프도 치시면서
건강관리도 하시고요. 그리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