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 초에 다음과 같은 민요가 유행했었다.
「양반(양반=한 양 닷돈) 가운데 /닷돈은 동학당이 먹고 /닷돈은
개화당이 먹고 /닷돈은 독립당이 먹고 /양반은 없소.」양반사회를 파괴한 이 개혁운동의 지도자 이름으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부르기도 했다. 「내주머니 양반(한냥닷돈)중 /김옥균이 닷돈 먹고 /전봉준이 닷돈 먹고
/서재필이 닷돈 먹어 /양반은 없소.」
일본 통감정치 때 과천에 양반 아닌 한 천민출신인 길영수(길영수)라는 이가 새로운 시대의 조류를 타고
육군참령(참령=소령)으로까지 승진을 하자 기존 계급의식에서 볼 때 파격적이요 충격이 컸다. 당시 양반들은
일본 침략으로 당하는 민족적 굴욕보다 그 침략으로 붕괴되는 신분의 몰락에 대한 반동과 반발이 보다 심했다.
그래서 「양반 없소」의 시대풍자 민요는 다음과 같이 변질되기도 했다. 「내주머니 양반중 /길영수가 닷돈
먹고 /일진회가 닷돈 먹고 /쪽발이가 닷돈 먹어 /양반은 없소.」
일본에 손꼽는 인류학자요 일제 때 서울에 있었던 경성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 교수이기도 했던
이즈미(천정일) 교수를 찾아간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얻을 자료 다 얻고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니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말소리를 낮추어 혹시 집안에 내려오는 족보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의외의 질문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됐다」면서 집이 누추하지만 가서 석양배(석양배) 한잔
하자는 것이었다.
집에 따라가 술잔을 나누면서 집에 족보가 있고 없고와 집이 누추한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고 물었다. 한국에서 오래 살아 한국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이 노교수는 집안에 전래된 족보가 있으면
적어도 준(준)양반일 확률이 높고 양반이면 물질적이고 금전적인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곧 데리고 가는 자신의 집이 누추하고 내는 술상이 박하더라도 흉이 안 되고 허물이 없을 것
같아 물어본 것이었다. 한국 양반의 장점을 잘도 꿰뚫어 본 노 교수였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 양반 행실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배 고파도 참고 추위에도 견디며 가난함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하며 기침일랑 입을 가려 적게 하고 관(관)은 꼭 소매자락으로 쓸어서 반듯이 쓰고 종을
부를 때에는 긴 목소리로 부르고 걸음은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걷는다. 손에는 돈을 쥐는 일이 없고 쌀값은 묻지
말아야 하며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아야 한다. 밥을 먹을 때도 의관 없는 맨머리를 하지 말아야 하고
먹는 데도 국물을 먼저 떠먹지 말며 국물 마실 때 소리가 나서 안 되고 수저 놀리는 데 소리를 내서 안 된다. 파
마늘을 먹지 말고 술 마실 때 수염을 적시지 말지어다. 담배도 불이 이지러지도록 세게 빨아서 안 되고
속상하는 일이 있어도 아내를 꾸짖지 말고 골이 난다고 그릇을 집어던지지 말며 강아지 배때기를 차지 말아야
한다. 종을 꾸짖을 때 죽일 놈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며 병이 나더라도 무당을 부르지 말며 화롯불에 손을 올려
쬐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나 행위를 조이고 극소화하는 양반은 고문기계인 철인형(철인형)이었다
해도 대과가 없었다.
초기 총독부 시절 아리요시(유길)라는 일본 서기관이 한국인의 고등관(고등관) 임용에 관한 인사서류 결재를
위해 당시 데라우치(사내) 총독실에 들어갔다. 총독은 서류를 상세하게 검토하더니 물었다. 『이 사람
양반이요 상민이요?』하고-. 아리요시 서기관은 그런 것은 알 필요도 없고 서류작성상 알아야 할 사항도
아니기에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총독이 묻는데 모른다고 할 수 없어 양반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총독은
『고등관은 양반이 아니고서야-』하며 도장을 찍더라고 회고했다. 왜 데라우치가 양반 여부를 물었는가의
진의는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그 하나는 한국사회에서 양반 아니고는
아랫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는 골이 깊은 계급의식을 감안한 것이거나 돈이나 권세 물정에 표변하는 상민이
아니라 이에 초연하는 자질을 한국 양반에서 보아낸 때문이었을 것이다.
횡포 또한 혹심했다. 인권차원뿐 아니라 경제적 차원에서 수탈이 과남했고 집안에 형틀을 차려놓고
사형(사형)을 자행하기 일쑤였다. 1910년대에 들어 양반의 세력이 죽어가고 상민의 권세가 상승하자 마을이나
고을마다 「단치」라는 계급항쟁이 유행했었다. 어느 마을의 세습양반이 횡포가 심하고 수탈을 옛대로 하려
들면 이에 불만을 품은 상민들이 모여 이에 저항하는 결사를 하는데 이를 단치라 했다. 단치를 텄다 하면 조상
대대로 그 집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전야제를 올린다. 짚으로 그 양반 인형을 만드는데 바지 저고리를
입히고 헌 갓을 씌우는데 이 인형을 단치라 했다. 이 단치를 그 양반 집 앞에 들고 가
불태우며「단치났네」「단치났네」를 외친다.
마을에 따라서는 짚 둥지를 크게 만들어 이 양반을 납치, 이
둥지 속에 담아 인근 소에다 던지기도 했다. 단치를 지도했던 꼭두는 그 길로 경찰서나 경찰 주재소에 자진
출두해서 자수를 하게 마련이다. 그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몇 달 옥살이만 하고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
일본경찰이 이 단치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은 단치 대상이 양반이 아니라 일본 지주나 경찰의
앞잡이로서 백성을 괴롭힌 앞잡이들로 파급됐기 때문이다. 곧 단치는 계급 투쟁뿐 아니라 침략에 저항하는
망각 속에 사라져가는 토속적 수단으로 기억될 만한 일이다.
계급타파로 양반은 사라져갔지만 워낙 뿌리깊었던지라 그에 대한 향수는 대단했다. 그를 가늠할 수 있는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고종황제가 돌아가시고 그 신주를 종묘(종묘)에 모시는 부태묘의(부태묘의)라는 의례가
있었다. 이 의례에 신주 가마를 메고 뒤따르는 분참봉이라는 임시벼슬이 있다. 이날 하루 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양반이 되었으니 음성적인 매매가 성행하여 큰 사회문제가 됐었다. 당시 신문보도를 보면 이렇다. 이
의례를 관장한 이왕직(이왕직)에서는 그 벼슬을 한 사람당 200원이라는 거금으로 밀매를 했던 것이다. 더욱이
정원이 100명인데 무려 450명으로 늘리기까지 했다. 양반 선망의 잠재층에 불을 지른 셈이다. 겨우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놈의 학업을 중단시키고 분참봉을 시키는가 하면 도쿄 등 일본에 유학시키고 있는 아들들마저
불러들여 양반으로 들여앉혔던 것이다. 물론 이 매관매직은 법망에 걸려 많은 양반신분이 증발되고 말았지만
양반이고 싶은 선망의 농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몰락양반의 위상을 가늠하는 사회현상으로 내외(내외)주점을 들 수 있다. 양반은 남녀 유별-곧 내외를
깍듯이 지켜야만 양반일 수 있다. 집안도 몰락하여 목구멍 풀칠하기 어렵게 된 데다 양반계층도 무너져
양반체통을 굳이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도 희박해졌다. 술집해서 호구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양반도 술집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물론 내외술집에는 술집표시가 없다. 알음알음으로 찾아가
문전에서 판자문을 약간 밀고 『이리 오너라』 하며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그럼 안방에서 『들어오셔
청마루에 자리를 깔고 앉으시라 여쭈어라』 하는 마님소리가 들린다. 손님이 자리를 꺼내어 앉고서 『올라
앉았다 여쭈어라』 한다.
마치 분부를 대행하는 종이나 비녀가 있는 것처럼 가상하여 마님과 손님의 대화가 진행된다. 술상을 차려
청마루에 내놓고 『안주가 변변찮으나 잘 드시라 여쭈어라』 하면 술상을 들고 가 술을 따라 마신다. 마시다가
흥에 겨우면 『마님더러 한잔 따르라고 하시라』 하면 『술잔을 드시라 여쭈어라』 하고 방안에 앉아 한자로
된 미려사구(미려사구)를 쓰며 권주를 하기도 한다. 그럼 손님이 역시 미려사구로 화답을 하기도 한다. 다
마시면 『술값이 몇푼인지 여쭈어라』 묻고 돈을 상 위에 얹어놓고서 『잘 마시고 간다고 여쭈어라』 한다.
그럼 『안녕히 살펴가셨다 또 들르시라 여쭈어라』 한다. 이렇게 주모와 손님이 얼굴 한번 맞대지 않는다해서
내외술집이다. 몰락양반의 눈물겨운 사회적응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이 몰락과정에서 양반의 증거인 족보매매가 성행하기도 했다. 세상의 앞날을 내다보고 양반 상놈의
계급차별이 없어질 것이라는 미래안과 양반신분에 얽매여 생업에 쪼들리는 것에 반발하여 양반신분을 돈받고
팔아버리는 사람이 많아지고, 또 상민 천민으로 너무 많은 천대를 받아온, 한에 맺힌 사람들이 그 족보와
호패를 사 양반으로서 한을 풀어보고자 매매가 성행했다. 이를테면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 암살한
홍종우(홍종우)는 남양 홍씨로 굴지의 양반이다. 가난에 찌들어 먹고 살길이 없는데 물장사를 하려 해도
신분에 걸려 할 수가 없자 족보와 호패를 일괄해 졸부에게 팔아넘기고 물장사를 해서 식구를 먹여 살린다.
20년대에 유행했던 「새양반」이란 민요에 이 사회상이 잘 나타나 있음을 본다. 「시골 동성(동성) 모아다가
/족보한다 돈 빼앗고 /조상의 비석 빼어다 /석재로 팔아먹고도 /족보마저 보자기에 싸든다 /이를 안 이웃집
상놈이 /양반 혼인 부러워 통혼을 빚으로 흥정하고 /볏섬으로 낡은 정자관을 사 쓰고 / 헛기침하며 마을을
도는데 /동네 아이들 뒤따르며 새 양반 타령한다.」
1910년의 호구조사에서 총가구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4217호로 겨우 1.9%에 불과하다. 그중
충청남도가 충남 전체 가구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고 충북(4.5%) 경북(3.8%) 서울인 한성(2.1%) 그리고
전북(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 충남 공주군 순이었다. 양반은 생각했던 수보다 한결 적었으며 그 소수가 다수의 민중을
지배해왔음에 한국사회의 특징을 가려볼 수 있는 것이다.
사진 1)몰락시기의 양반 가족들의 개화복장. 관도 안 쓰고 남녀장유(남녀장유)의 복장들이 간소화됐음을 볼 수
있다. 철종의 사위(부마)로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전형적 양반 박영효(박영효)의 1890년대 일가사진이다.
사진 2)한양의 양반촌인 북촌과 경복궁의 경계를 이루는 중학천의 옛 모습. 멀리 경복궁의 동남 모서리에
세워진 동십자각이 보인다.
사진 3)몰락시기의 양반행차. 갓 테의 폭과 갓끈의 길이가 줄어들고 스스로를 높이는 뜻에서 색안경을 쓰고
나들이하는 것이 유행이었다.